12시 30분.
난 또 다시 관악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체감온도는 영하 10도라 한다. 턱밑으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으나 등산복 덕분에 춥지는 않았다. 제4야영장에서 연주대로 향했다. 얼마 전에 올랐던 곳이다. 그러나 이번에 오른 길은 지난 번에 내려온 길이었다. 오른 길과 내려온 길은 같지만 달라 보였다. 같은 것이 내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인간의 인식은 그래서 한계가 있고 불완전한 것이리라.
지난 번에는 눈이 덮혀 있었던 길이었지만 오늘은 눈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눈은 녹고 태양의 열기에 말라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바람이 몹시도 차가웠다. 씽씽 괴성까지는 지르면서 바람은 능선을 따라 올랐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에 따라 메마른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온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나무들은 그 자리에 있다. 동물들은 따뜻한 곳으로 옮기는 기회주의자이지만, 나무들은 변함없는 인내주의자리라. 문득 그 동물의 하나인 인간들의 약삭 빠른 삶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문득 내 눈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질퍽한 상태에서 찍혔던 것이 얼면서 남아 있는 것이었다. 누구의 발자국일까? 난 이내 피식 웃었다. 그것을 따져서 뭐 하나. 아무개의 발자국이다. 아마도 지나가는 사람마다 자기 발자국이라 해도 괜찮으리라. 그 어떤 누구도 산의 주인은 아니지 않은가?
연주대는 그대로였다. 다만 지난 번과 달리 사람들은 적었 다. 날씨가 추워서 그만큼 사람은 없는 것이리라. 역시 산 정상답다. 그 어느 곳보다 바람이 매서웠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따라 마셨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랐다. 그래서 마스크를 꺼내 썼다. 경직되어가던 턱끝이 조금씩 풀려갔다. 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져온 커피를 권했다. 뜨거운 커피만큼이나 인정도 따스하게 전해지리라.
난 곧바로 내려가기가 그래서 능선을 따라 옮겨가기로 했다. 팔봉능선이 험하지만 재미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나도 그 재미를 맛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그만 봉우리들로 연이어져 있었다. 기암괴석들이 '내 이놈 어딜 감히 올라오려 하느냐'는 듯이 험했다. 바위 주위로 지나가는 길이 있었으나 난 바위 위를 넘는 길을 일부러 잡아나갔다. 바위 끝에 서서 사방을 둘러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래를 보면 눈이 아찔한 절벽이었으나, 저쩍 능선을 따라 바라보거나 하늘을 바라보면 장쾌한 허공이었다.
한 번은 바위를 내려가는데 손과 발을 짚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난 바위에 바짝 붙어서 내려가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배낭을 벗어 몸의 무게 중심을 좀더 바위 쪽에 놓으면서 내려갔다. 그러나 무게 중심을 바위에서 떼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는 바위의 틈을 잡고 있는 손끝을 믿고 몸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손끝을 믿고 몸을 맡기는 용기. 그것은 곧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리라.
지나가는 사람이 내 배낭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발 디딜 곳을 알려주었다. 그 사람 덕분에 조금 수월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역시 누군가 도와주어야만 삶은 손쉽게 살 수 있으리라. 그것이 인간의 최대 장점이고, 자연은 그로 인해 정복당한 것이 아닐까?
얼마나 내려왔을까? 이전과는 달리 평탄하면서 바위들이 없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능선을 내려와 산마루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 따라 내 산행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내려온 느낌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내가 내려온 곳은 학바위능선인것 같았다. 팔봉능선을 따라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나 나중에 또 올 수 있는 핑계가 될 수 있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관악산 출입구로 내려 오면서 관악산을 올려다 보았다. 붉은 색 기운이 엷게 드리운 관악산 꼭대기는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난 또 다시 가슴 가득히 뿌듯함을 담았다. 올해도 하루 앞둔 오늘.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