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30분.
홀로 북한산으로 향했다. 연신내역 3번 출구에서 34번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 승객들은 모두 등산객들이었다. 구파발역에서 나머지 등산객들을 태우고 버스는 북한산성입구에 도착했다. 작년 중간고사 때 학교 등산대회로 왔던 곳이다. 처음 혼자 북한산을 오르는 것이라 일부러 아는 곳으로 왔다. 그래서 덜 헤맬 것 같았다.
대남문으로 직접 오르는 계곡길을 갈까 하다가, 의상봉으로 길을 잡았다. 처음 오는 것이니 만큼 능선을 타고 가면서 북한산 전체를 조망해 보고 싶었다. 며칠 전 많은 눈이 왔기 때문에 하얀 옷을 입은 산이 한 눈에 들어오리라는 생각에 내 마음은 조바심을 내었다.
얼마 안 오른 것 같았는데 벌써 암벽들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눈이 없어도 오르기 힘들 것 같았는데 눈까지 쌓여 있으니 미끌미끌했다. 어떤 아주머니는 팔에 힘이 부족해 바위를 힘차게 차고 오르지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오르려는 기를 잃지 않았다. 험하긴 험했다. 여기저기 밧줄과 쇠줄이 늘어져 있었다. 그것을 잡고 올라도 녹녹치 않았다. 아이젠과 장갑이 없었으면 아마 나는 길을 되돌렸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준비 철저가 얼마나 필수인지를 깨닫는 순간이다.
의상봉에 올랐다. 힘들었던 만큼 쾌감은 컸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은평 뉴타운 공사가 한창이라 여기저기 아파트들이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왼편으로 멀리 펼쳐져 있는 능선을 바라 보았다. 하얀 눈과 깎아내린 듯한 절벽이 어울어져 겨울 정취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하늘은 왜 그리도 파랄까? 바람도 없었고 기온도 그다지 낮지 않은 것을 보면 날씨가 추워서 그런 것은 아닐 성 싶다. 아마 높은 산봉우리에 여기저기 찔려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은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용출봉으로 향했다.
험난한 길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일까? 용출봉 이후로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날씨도 춥지 않고 해서 내피로 입은 조끼를 벗어 배낭 속에 집어 넣었다. 한결 가볍고 온기도 적당했다. 가사당 암문이 바로 앞에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절벽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아래를 바라 보니 커다란 불상의 등이 보이고, 절 기와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위에서 부처의 등을 바라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기와 지붕과 불상을 한 컷에 들어오도록 하여 사진을 찍었다.
처음 오는 길이라 산봉우리 이름을 몰라 앞에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물으며 걸었다. 용출봉은 지난 번에 낙뢰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덤으로 해 주었다.용출봉과 용혈봉은 쌍둥이처럼 나란히 있었다. 아마도 용이 서려 있고 하늘로 올랐던 곳이 여긴가 보다는 생각을 하면서 넘어 갔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느라 삼삼오오 몰려 있었다. 하얀 설경과 파란 하늘. 이 배경만큼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도 없으리라. 사람들은 한 때나마 마음이 하얗게 되고 파랗게 되었을 것이다.
증취봉에서 다시 한 번 왼편 능선을 바라보았다. 아까 보았던 절벽들이 다른 모습으로 내게 들어왔다. 옛그림에서 절벽은 거친 붓으로 세로로 선을 그어 깎아지른 듯한 이미지로 그려져 있는 것을 종종 보았다. 그것이 결코 허튼 짓거리가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산 속에 절에 아주 작게 그려진다. 역시 능선과 계곡 중간에 있는 암자도 그러했다. 넓은 산 배경과 작은 암자. 그것이 바로 이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월봉과 나한봉은 험한가 보다. 다른 봉우리에서는 보지 못한 우회로 표지판이 있었다. 봉우리로 오른 흔적이 있어 그 길로 갈까 하다가 표지판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봉우리와 달리 험할 것 같아 우회로로 길을 잡았다. 우회로도 만만치 않았다. 길이 좁아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 길을 양보하며 가야했다. 문득 용기가 만용이 되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본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용기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만용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눈이 쌓인 이 길을 나보다 앞서 간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난 어렵지 않게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 번의 의문을 가져 본다. "나는 길을 개척할 것인가, 길을 따라 갈 것인가?" 길을 개척하는 것은 쾌감이 크지만 어려움이 많다. 길을 따라가는 것은 그 반대이리라. 나는 때로는 길을 개척하지만 때로는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용기와 만용, 개척과 따름. 북한산에서 나는 혼자 이런 생각에 잠겨 보는 것이다.
11시 방향으로 사람들이 길게 산봉우리를 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얀 눈 속에서 사람들은 검게 보였다. 자세히 바라보니 길이 험난해 사람들이 지체하고 있었다. 저기가 어디냐 물으니 문수봉으로 가는 길이란다. 다시 보니 아까 내가 봉우리 이름을 물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가져온 커피를 그들에게 한 잔씩 건넸다. 초보자들은 지금 밟아온 코스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그들과 헤어져 문수봉으로 갔다. 얼마를 갔을까? 아까 의상봉을 힘들게 오르던 아주머니를 만났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나아갔던 것이다. 나는 산을 잘 탄다는 칭찬을 한 마디 해 주었다. 기분이 좋은지 내게 인사를 한다.
문수봉을 오르는 길은 멀리서 본 대로 험했다. 끝까지 쇠줄이 이어져 있었다. 가팔라 숨도 가빴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올랐다. 발에 힘을 줄 수 없을 만큼 미끌미끌 했다. 이럴 때는 팔에 힘을 잔뜩 넣어 한 번에 줄을 타고 올라야 한다. 오랜만에 팔운동을 한 셈이다.
문수봉에 올랐다. 사방을 둘러 보았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능선들이 눈에 들어 왔다. 문득 영어가 들려 돌아 보니 외국인이 아래에서 올라 오고 있었다. "I will bring it." 뭘까 하고 보니 국기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가져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지. 누구나 정상에 오르면 호기를 갖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전리품을 챙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봉우리를 오르면 더 겸손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대남문으로 내려왔다. 널찍한 공터에서 사람들이 모여 이것저것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수사를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아이젠을 벗고 절 마당에 들어섰다. 절은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명필가 탄연국사와 인연이 있는 절이었다. 보잘 것 없는 절이 왜 이다지 유명할까 하던 차에 눈을 돌려 앞을 보는 순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말 병풍같이 절벽들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문수사는 그것을 바라보며 진리를 깨닫고 있는지 모른다. 진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아는 자에게만 보이는 것일가? 과학의 차가운 이성이 아닌, 아름다움을 느끼는 예술적 감수성으로 불도를 깨우쳤던 탄연. 그가 현대인들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대웅전 처마 밑으로 고드름과 풍경이 어울려 걸려 있었다. 그 고드름이 결코 차갑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풍경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용한 경내와 쭉 펼쳐진 병풍같은 절벽. 맑은 풍경 소리가 문수사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있었다.
구기계곡을 내려와 막걸리 생각이 나 북한산 순두부집으로 들어갔다. 혼자 들어가는 것이 쑥스러웠으나 그런 대로 운치가 있었다. 막걸리가 나오자 한 잔 쭉 들이켰다. 목이 마르고 힘이 빠졌던 차라 막걸리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차가운 기운과 함께 막걸리의 쌉싸란 맛이 가슴을 타고 들었다. 생두부 한 입도 그러했다.
막걸리를 마시며 내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 보았다. 처음부터 험난한 코스를 잡은 것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온다는 것은 외로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 외로운 존재가 아니던가? 막걸리 한 잔이 벗이라면 벗일까? 북한산과 막걸리는 혼자 맛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