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물락쪼물락.
“이게 왜 이렇게 안 꿰지는 거야?”
산 지 얼마 안 되는 등산화라 부드럽지 못해서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오랜 만에 신어보기 때문이리라. 등산화의 끈이 잘 꿰지지 않았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산행을 갔다 온 것이 기억이 가물가물할 뿐이다. 등산화를 신고, 점퍼를 입으면서 쑥스럽기까지 하다.
9시 연신내역에서 전국주, 정종구, 왕필엽, 황보영건 선생님을 만났다. 정선생님은 이틀 동안의 제주도 출장을 갔다온 여독이 풀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올해 들어와 처음 산행이어서 오고 싶었다 한다.
우리 팀 말고도 등산을 하려는 여러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 역시 산행은 즐거운가 보다.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33번 버스가 왔다. 우리는 보광사에서 출발하기로 했기에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차에 오르는 팀은 우리 팀밖에 없었다. 그것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을까? 그러나 그때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꼬불꼬불한 왕복 2차선의 산길을 가는가 싶더니 어느덧 보광사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그러나 산행을 하려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보광사 쪽으로 올라가니 몇몇 사람들이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어 보니 오늘 영산제가 있어 준비 중이란다. 절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큰 절이었다. 대웅전도 오랜 세월을 지내온 듯한 흔적이 역력했다. 조선 영조와 관련된 이야기와 석조대불에 관한 일화를 전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러한 얘기는 등산이 힘들게 산을 오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전 선생님의 설명으로 또 하나의 지적 유희를 즐기는 것이었다.
절 뒷문을 빠져 나와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고령산아 기다려라!’
이렇게 마음 먹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좀 가파른가 싶었는데 그것이 계속 되는 것이었다. 관악산은 완만하다가 정상에 가까워졌을 때 가파르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다는 것을 못 느꼈다. 그런데 이 산은 처음부터 가파르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오른 탓일까? 허벅지가 뻐근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황보 선생님은 저 앞으로 치고 나선다.
도솔암이다. 가파른 언덕에 조금 평평한 곳에 세워진 조그만 암자였다. 가쁜 숨을 진정시킨면서 정 선생님이 싸온 오이를 먹었다. 역시 산행에 오이가 제 격이다. 시원하고 촉촉한 것이 몸 속의 피로를 씻어낸다. 두세 팀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그 뿐이었다.
도솔암에서 우리의 산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산길은 있었지만 넓지도 않고 두드러지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는 얘기리라. 우리가 오르려는 곳은 앵무봉이라 한다. 길은 가파르게 이어져 이전 산길보다 더 심했다. 정 선생님은 제주도에서 과음한 여파가 밀리는지 좀 처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군 참호가 보이는가 싶더니 눈 앞에 레이더와 같은 철제 구조물이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지뢰 위험”
‘아니 이 곳에 무슨 지뢰야?’ 싶었다. 경고판을 보니 2005년에 지뢰를 제거했으나 유실한 것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이제야 좀 알겠다, 왜 다른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지를. 우리는 622m 정상에서 주위를 내려다 보았다. 안타깝게 스모그로 인해 주위를 뚜렷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전 선생님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면서 이어지고 이어진 산자락들을 짐작했다.
우리는 다시 길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된다. 그래서 처음 때와는 달리 편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갈 수 있었다. 군사기지가 옆에 보였다. 휴일이라 그런가 초병이 보이지 않았다. ‘저걸 우리가 접수해?’라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길을 걸었다. 우리가 가는 길을 철쭉과 진달래로 이어져 있었다. 아쉽게도 철쭉과 진달래의 화려한 꽃봉오리는 볼 수 없었다. 만약 그것들이 흐드러지게 핀다면 가히 환상적인 풍광이라 짐작해 본다.
조금 가니 보기 드문 커다란 바위 절벽이 보였다. 우리는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당황했다. 왜냐하면 난 산행을 끝내고 점심을 먹는 줄 알고 아무것도 준비를 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배낭을 열더니 이것저것 내놓는 것이었다. 절로 탄성이 나온 것은 왕 선생님의 빈대떡이었다. 만져보니 온기가 느껴졌는데 오늘 아침 사모님이 준비해 주신 거란다. 청양고추가 들어갔는가? 한 입 베어 무니 얼큰한 맛이 톡 쏘고 들어왔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염치 불구하고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청주와 복분자주도 있었다. 과음을 했던 정 선생님은 술 안 먹기로 마음 먹고 왔지만 한 잔 안 할 수가 없었는지 몇 잔을 기울인다. 역시 산 정상에서의 식사는 신선의 그것이라는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우리가 내려갈 장흥 유원지를 내려다 보며 다시 발을 옮겼다. 봄바람이라지만 피부로 스미는 바람은 좀 싸늘했다. 그러나 흐르는 땀과 서늘한 바람이 만나서 내 몸을 어루만지는 것은 상쾌함 그 자체였다. 거기에 따스한 햇살까지 받으니 몸은 고되도 날아갈 것 같았다.
커다란 철제전신주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정 선생님이 군 시절 구리 전선 팔아 먹었던 동료 이야기를 들려 주니 잠시 우리는 웃음으로 숨을 돌렸다.
“저거 참 희안하다!”
누군가 한 말을 따라 바라보았다. 저쪽 산자락이 직각으로 잘려있는 것이었다.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공적인 시설물 같은데 짐작이 되지 않았다. 무슨 군시설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산을 내려와 보니 그것은 천문대 건물이었다. 나중에 아이들 데리고 별자리 보러 온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산을 내려가기 전에 널찍한 공터를 만났다. 묘가 있었던 것 자리 같았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장한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잡고 앉아 남은 음식들을 다 먹기로 했다. 청주와 복분자주를 다 비웠다. 그러나 취하질 않았다. 아마도 널찍한 공터와 산의 정기, 그리고 맑은 공기가 취하지 않게 하는 안주였나 보다. 우리는 술을 기울이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따뜻한 햇살처럼 선생님들의 말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우리가 자리를 털고 내려왔을 때가 오후 1시 30분. 교통편도 알아 볼 겸 해서 찻길을 따라 걸었다. 권율장군 묘도 보였다. 그냥 가기가 뭐하니 막걸리 한 잔 하자고 해서 길 옆에 있는 음식점에 들렸다. 도토리묵과 해물파전을 기울이며 동동주를 두 동이 비웠다. 정 선생님과 전 선생님의 구수한 얘기가 막걸리 향처럼 들려 왔다.
오랜 만에 느끼는 산행의 즐거움이었다. 그 동안 느꼈던 업무 스트레스와 어머니 병간호 부담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이것이 삶의 재충전일까? 내일 또 다시 스트레스와 부담이 밀려오겠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부딪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산행은 오는 4월 28일이란다. 아마도 그 날은 봄의 절정을 이룰 것이다. 더 많은 햇살과 꽃들, 그리고 구수한 얘기들을 접할 수 있겠지?
2007.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