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선생은 그때를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정 선생을 보며 피식 웃고는 양호실 앞으로 갔다. 양호실 문을 열었을 때 김 선생은 한 학생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학생은 신 선생을 보자 흠칫 놀라면서 머뭇거렸다. 신 선생도 그 학생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또 수업 시간에 아프다는 핑계로 양호실에 온 놈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오세요. 한 시간 후에나 오실 수 있다 하시더니…….”
김 선생은 신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학생보고는 그만 가보라고 했다. 그 학생은 부리나케 김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는 신 선생의 곁을 비키면서 나갔다. 신 선생은 그 애를 대수롭지 않게 보며 대신 김 선생 옆에 놓인 꽃을 보았다. 무슨 꽃인지는 모르나 아홉 송이가 분명하게 보였다.
“수선화예요. 싱그러운 색깔이죠? 이뻐 보여요?”
신 선생은 ‘그래요’라고 지나가는 말로 엉성히 대답하고서는 김 선생이 내주는 의자에 앉았다. 김 선생은 아주 작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신 선생보다 열 살이나 위였지만 여전히 소녀 같다는 말을 다른 선생들은 하고 있었다. 사실 학생들 사이에서 그녀의 별명은 ‘소녀’였다. 물론 얼굴에 주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주름들은 눈가에 있었는데,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생겼다기보다는 미소를 많이 짓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김 선생은 보는 사람에게 늘 미소로 대해 주었다.
“바쁘시다면서요?.”
“예, 일이 생각보다 좀 빨리 끝나서요.”
신 선생은 둘러댔다. 바둑 두기 위해 시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미 경찰서에는 수업이 다 끝나고 오후에 가겠다고 해 놓았으니, 바둑 둘 시간은 충분했다. 그래서 김 선생의 얘기가 별 거 아니면 대충 듣고 바둑을 두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 우리 반 29번 말입니다. 어떻게 그 애를 아세요?”
“아, 기진이요. 오늘 결석한 거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오토바이 절도 때문에 경찰서에 있는가 봅니다. 아까 형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 선생의 뜻하지 않은 말에 신 선생은 김 선생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구요, 연락을 받았다구요?”
이건 이상했다.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으레 담임 선생이나 학생부 선생을 찾게 되어 있다. 그리고는 사안이 경미할 경우 담임 선생이 가서 선도를 책임지겠다고 각서를 쓰고 학생을 데리고 나오면 일은 간단히 끝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담임 선생으로서의 위신도 서고, 경찰서 쪽도 일이 편했다. 만에 하나 그 학생으로 인해 책임을 질 일이 있어도 이리저리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게 관례였다. 그것을 신 선생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학생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김 선생에게 연락이 왔다는 소리에 신 선생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게 먼저 연락이 왔었습니다. 형사가 기진이에게 담임 선생님 성함을 대라고 하니까 그 애가 제 이름을 말했나 봅니다. 그래서 형사로부터 자초지정을 다 들었죠. 듣고 나니 아무래도 이건 담임 선생님이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아, 제가 기진이 담임이 아니고 신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라고 가르쳐 드렸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김 선생에게 먼저 연락이 오고, 그 다음에 내가 연락을 받다니. 신 선생은 더 이상 말을 않고 김 선생의 얼굴만 계속해서 쳐다 보았다.
“주제넘은 얘긴 것 같지만 아무래도 신 선생님께 말씀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고 말을 꺼낸 김 선생은 신 선생의 얼굴 표정을 이리저리 살폈다. 얼굴이 굳어져 있는 신 선생을 보고 김 선생도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다가 결심을 한 듯 김 선생은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는 말을 꺼냈다.
“아마 선생님은 제가 학생들의 상처나 치료해 주고, 약만 주는 일만 한다고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양호실에 있으면서 학생들과 많은 얘기를 나눈답니다. 선생님은 어떤 애들이 양호실에 오는지 아세요?”
신 선생은 뜻하지 않은 질문에 말을 하지 못했다. 신 선생은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고, 그런 통계를 본 적도 없었다. 김 선생은 신 선생에게서 대답이 없자 말을 이었다.
“소위 문제 있는 학생들이 많이 온답니다.”
신 선생은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공부하기는 싫으니까 꾀병을 부려서라도 교실을 빠져 나오고 싶었겠지.’
신 선생의 머리 속에는 간단한 연역 논리가 또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 애들이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맞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별 거 아닌 것을 가지고 양호실로 온답니다. 그런데 선생님, 그 애들이 꾀병을 부리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신 선생은 생각했던 대로 ‘공부하기 싫으니까 그렇죠.’라고 대답했다.
“그렇죠. 그런데 더 깊은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해 보셨는지요.”
‘더 깊은 이유?’
그런 것이 있느냐고 신 선생은 되물었다. 그러자 김 선생은 눈가의 주름이 지도록 미소를 띠며 신 선생을 보았다.
“학생들은 얘기를 하고 싶어 양호실에 온답니다. 저는 양호실에 오는 애들을 치료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답니다. 신발 색깔이 참 이쁘구나, 오늘 비가 참 많이 오지, 아침은 먹었니 같은 얘기를 나누죠.”
신 선생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무래도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쓸 데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대충 얘기 끝내고 바둑이나 두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김 선생도 신 선생이 별로 자신의 얘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는지, 기진이 얘기로 돌아갔다.
“기진이도 그런 애들 중에 하나였어요. 양호실에 하루가 멀다 하고 왔어요. 그래서 그 애하고도 많은 얘기를 나눴죠.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은 그 애가 어디서 사는지 아세요?”
김 선생의 물음에 신 선생은 머릿속에 출석부의 앞장을 뒤지고 있었다. 그 속에는 아이들의 주소가 정리되어 있었다. 29번이 사는 곳이면, 신 선생의 기억에 신림 5동이었다.
“신림 5동에 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신 선생은 숫자에 관한 한 자신의 남다른 기억력에 스스로 감탄하면서 비로소 약간의 미소가 입가에 얹혀졌다.
“아니, 그 애가 누구와 살고 있는지 아시느냐구요.”
이에 대해 신 선생은 부모와 살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 선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 선생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해 보았으나 자신이 뭘 잘못 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자 잠시 후에 김 선생이 말을 꺼냈다.
“그 애는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신 선생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자신의 반 환경 조사서 통계에는 부모가 없는 애들은 ‘ 0 ’이었다. 신 선생은 무슨 소리냐고 했다.
“물론 그 애의 환경 조사서에는 부모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부모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선생님, 그 애의 할머니집이 어떤지 아세요?”
다시 신 선생은 머릿속에서 가정 환경 조사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자택에 살고 있고, 수입이 꽤 되는 걸로 되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신 선생은 기억나는 대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애가 거짓말을 했나 보군요.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 애 할머니는 생활보호대상자입니다. 가정 환경 조사서의 내용을 허위로 기재했군요.”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