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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계몽주의의 보편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톨레랑스가 사회적 가치로 받아들여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데 그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다. 파시즘의 광기에 반발하는 측면도 있었고 노동계급의 꾸준한 투쟁도 성과를 거뒀지만 무엇보다 1945~73년에 전례 없던 경기 호황이 있었다는 것이다. 호황의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파트너’로 삼아 잉여가치의 일부분을 나눠줄 여유도 있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끊임없이 새 노동력이 필요했다. 현재 유럽연합 총인구의 약 5.5%에 이르는 이슬람계 인구는 그때 알제리 출신들의 프랑스 이민, 모로코 출신들의 네덜란드 이민, 터키 출신들의 독일 이민 등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 독일의 경우 해마다 난민 신청자의 85%에게 체류 허가를 내주는 것이 보통 일이었다. 난민에게 비교적으로 덜 잔혹한 노르웨이에서마저 80%의 신청자가 퇴짜를 맞는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신화처럼 들리는 이야기다. 그때가 바로 ‘톨레랑스의 황금기’였다.
(다) 유럽의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1970년대 오일쇼크에 빠지고 성장률·이윤율이 둔화했다. 1980년대 탈산업화가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부터 제조업이 동유럽, 중국 등지로 이전되었다. 그에 따라 유럽의 지배자들에게 미숙련 노동에 대한 수요가 급감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동유럽에서 온 ‘문화·인종적으로 동질적’인 노동자들을 단기적으로 수입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실업의 화살은 이슬람 계통 이민자들에게 날아왔다. 피부색이 달라도 유럽 현지 수준의 월급을 요구하고 노조에까지 가입해 분쟁을 일으키는 아프리카·중동 출신의 이민자들을 쓰느니, 차라리 우크라이나 출신을 6개월간 들여와 한 달에 700~800달러만 주고 실컷 부려먹은 뒤에 보내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유럽자본가들의 계산이었다. 이슬람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길은 학력 축적을 통한 신분 상승인데, 주류 사회에서 인종주의가 내면화돼 있는 상황이라 그것도 어려웠다. 프랑스 대졸자 중에서 이슬람 계통들의 실업률이 유럽인 토박이보다 3배 이상 높다는 것은 과연 본인들이 못나서일까? 인종차별 방지법이 있어도 유럽 고용주들이 성명란에 ‘아흐마드’나 ‘모하메드’라고 적혀 있는 이력서를 맨 뒤로 밀어놓는 일은 몸에 밴 것이다. 톨레랑스는 겉으로만 존재할 뿐 속으로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라) 그런데 경제적 이용 가치를 상실해 게토*에 몰려 사회복지망에 의존해서 살게 된 이슬람 계통 빈민 이민자들에게 정치적 이용 가치가 붙어버렸다. 덴마크·네덜란드 등지의 극우 정권들은 반이슬람 광풍을 이용해 집권했고 이민자 청년들을 ‘쓰레기 인간’으로 명명해 구설수에 오른 프랑스의 정치인도 같은 전략을 구사해 대통령직을 노리고 있다. 톨레랑스는 빈 명분이 됐고 앵톨레랑스(불관용)야말로 정치판에서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지경이다.
(마) 경제적 침체기이며 첨예해진 경쟁 시대에 유럽 지배자들에게 톨레랑스는 허구다. 그러나 만약 유럽의 백인 노동계급이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는 연대만이 살 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에 나선다면 톨레랑스는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 지난 여름에 영국항공(BA) 기내식 납품업체 게이트 구르메가 주로 이민자 여성인 수백 명의 노동자를 전격적으로 정리해고하자, 주로 백인 남성인 수화물 처리 노동자들이 주동이 되어 들고일어나 런던공항이 마비돼 악덕 기업주인 영국항공사가 4천파운드 정도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요즘 특히 신자유주의의 공격이 거친 영국에서 이와 같은 연대 투쟁의 고무적인 사례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톨레랑스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게토(ghetto): 예전에, 유대 인들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거주 지역. 미국에서, 흑인 또는 소수 민족이 사는 빈민가.
-박노자 <톨레랑스, 유럽의 새빨간 거짓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