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ARI의 희로애락

Blocks, 현대 도시인들의 아바타

 

영화 <트랜스포머>를 보며 기계에게도 영혼, 정신이 있다는 것을 신기해 했다. 소크라테스 이후 현대에까지 이어진 물질, 신체와 대비되는 영혼, 정신, <트랜스포머>에서는 기계에게도 있다고 한다. 더욱 신기한 것은 기계의 영혼, 정신이 이성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계산기, 튜링기계만 하더라도 그것들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들에게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논리적 계산만을 하는 것은 기계이다. 미움과 사랑, 슬픔과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인간이다. 인간을 단지 이성적 존재라고만 한다면 누구도 수긍하지 않는다.

찬민이의 <공간의 포위>를 보며 문득 <트랜스포머>의 오토봇과 디셉티콘이 떠오른 것은, 그의 블록스가 영혼, 정신을 가진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진의 대상은 빌딩들이다. 철골과 콘크리트, 유리로 만들어진 빌딩들. 그런데 영혼, 정신을 가진 빌딩이라니……. 말도 안 될 것 같은 상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찬민이의 사진 속 블록스들은 당당하게 서 있다. 그 당당함은 수직의 선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진다. 수직의 선은 도전의 상징이다. 하늘에 닿기 위해 높이 올라간 바벨탑도 수직의 선이다. 찬민이의 사진들은 이 수직의 선들로 채워져 있다. 수평의 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수직의 선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보조에 지나지 않는다. BL214365198127251931, 2014에서 아파트들이 군집을 이루고 땅과 하늘 사이에서 서 있다. 단순화된 수직의 선들이 아파트들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거기에 수평의 선들을 보여주는 땅은 아파트의 존재를 확고하게 만든다. 그러니 아파트들이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보이고 있는 듯한 것이다.

 

찬민이의 사진 속 블록스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상식적으로 빌딩은 인간을 위한 수단이다. 우리 인간은 그곳에서 잠을 자고, 사무를 보고,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찬민이의 사진 속에는 인간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빌딩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는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다. 아니 찬민이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무시했다. 아마도 사진 속 블록스에서는 인간들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데, 찬민이는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등장하는 사진이 몇 점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사진들 속 인간들은 너무나 작게 잡혀 있다. Urbanscape_045, 2012에는 빌딩에 매달려 있는 유리창 닦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주 작아서 몇 번이고 지나쳤다가 나중에서야 어렵게 발견되었다. 블록스에서 인간은 별 것이 아닌 존재이다. Urbanscape_002, 2014Urbanscape_006, 2014에도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사진 속 빌딩들은 사람들과 떨어져서 서 있고 찬민이의 초점은 원경인 빌딩에 맞춰져 있다. 인간과 동등한 입장에서 옆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찬민이의 사진 속 풍경을 보면서 나는 동양의 산수화를 떠올렸다. 우리 조상들은 산이나 절벽, , 그리고 나무들 속에도 영혼, 정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화폭에 담았다. 그 속에 인간이 그려진다 해도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그려진다. 산수화의 산수들을 지우고 블록스들로 채워보자. 그리고 가끔 인간도 자그마하게 놓아 보자. 찬민이의 블록스에 대한 정신은 어쩌면 우리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정신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찬민이의 사진 속에서 블록스들 사이의 투쟁을 느낀다.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건물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Urbanscape_023, 2012에는 새로운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고, 그것은 기존의 빌딩에게 새로운 도전을 하는 듯 하다. Urbanscape_097, 2015에서도 낡은 빌딩을 억누르고 새로운 빌딩이 권력을 잡고 있다. BL215375573126950232, 2015에서는 아파트와 빌라들 사이의 계급 투쟁을 보는 듯하다. 서양에서 영주들의 성들이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내려다 보며 그 속에서 일하는 농노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권력을 실감했다. 새로운 빌딩들은 바로 낡은 빌딩을 내려다 보며 자신의 권력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나는 찬민이의 <공간의 포위>를 보며 또 하나의 영화가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아바타>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인류는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Na’vi)’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하여, 원격 조종이 가능한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탄생시키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나는 찬민이의 첫 개인전 ‘Intimate City’를 보고 난 뒤, 빌딩을 도시인을 대신하는 아이콘이고 했다. 그런데 난 이번에 찬민이의 블록스들은 도시인을 대신하는 아바타로 보고자 한다. 아이콘(icon)은 상징(象徵)으로, 아바타(avatar)는 화신(化身)으로 번역된다. 블록스들이 도시인의 은유가 아니라 도시인의 정신과 영혼을 대신하는 존재인 것이다. 어쩌면 찬민이는 블록스들을 우리 도시인들의 또 하나의 아바타로 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찬민이의 블록스들에서 점, , 면 등의 기하학적 요소들이 강조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회화에서 이것들은 조형 요소에 속하는 것으로서, 다른 요소들에 비해 사람들의 관심이 적은 편이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회화가 이 세상의 그 무엇인가를 재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찬민이는 블록스들을 점, , 면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Urbanscape_006, 2014에서 선이 극대화되고, Urbanscape_074, 2015에서는 점이 극대화된다(사각형으로 된 창은 화면에서 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Urbanscape_075, 2015에서는 채도가 다른 면들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면 찬민이는 도시의 재현을 거부한 것이 아닌가? 물론 빌딩들은 점, , 면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빌딩을 재현하는 데 동원된 것임은 명확하다. 그러나 찬민이는 단순히 재현을 위해 점, , 면을 이용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찬민이의 사진과 시각적으로 소통해야지, 거기에서 재현된 빌딩의 모습을 봐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찬민이가 빌딩들의 창문을 지우는 과감함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왜곡과 재현의 줄타기를 통해 점, , 면의 기하학적 요소에 시선을 끌어 모으는 찬민이의 의도가 있다는 얘기다.

또 하나 찬민이의 블록스들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회색과 검정색이다. 무채색 계열의 회색과 검정색은 무미건조함의 대명사이다. 우리의 도시는 빌딩의 재료로 인해 회색과 검정색을 띨 수밖에 없다. 그것을 찬민이는 그대로 잡아냈다. 이것은 찬민이가 대낮에 블록스들을 카메라에 담은 이유와 맞닿아 있다. 도시의 야경은 수많은 것들을 감추고 화려한 불빛으로 채운다. 그래 가지고는 블록스들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 블록스들의 참모습은 변화무쌍한 색들의 향연이 아니라 무채색의 표정없는 얼굴이다. 그것을 Urbanscape_092, 2015, Urbanscape_094, 2015 등에서 나는 본다. 물론 간간히 녹색과 붉은 색, 파란색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찬민이에게 그런 색들은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다. 사진 속의 주연인 블록스들의 색은 회색과 검정색이다.

내가 찬민이의 사진에서 점, , 면이라는 기하학적 요소와 회색과 검정색이라는 무채색에 주목하면서, 블록스들을 정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이고, 도시인의 아바타로 본 것은, 바로 찬민이가 현대인의 특성을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이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개성을 강조하지만 진정한 개성은 없고 상품의 이미지에 기댄 획일성에 살고 있다. 나아가 익명성으로 무장한 채 군중 속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 문득 그런 현대인의 모습을 찬민이의 블록스들에게 본 것이다. 어쩌면 블록스들에게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조형 요소들을 강조하는 찬민이는 사진을 객관적으로 봐 달라고 한다. 아마 찬민이도 나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블록스를 보며 <트랜스포머>에서 오토봇이 인간과 함께 석양을 보는 모습과 <아바타>에서 링크를 해제하고 나비족 속에 함께 하는 아바타의 모습이 떠올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Posted by pop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