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ARI의 희로애락

   1940년대 후반의 일본. 맥아더 장군 등 미국 보수파의 도움으로 천황제가 패전 이후에도 살아남았으나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띤 신”이 아니라고 ‘인간 선언’한 히로히토는 수많은 진보파들에게 흉악한 전범으로만 인식됐다. 그런데 히로히토는 다시 살아났다. 그는 흔들린 황실의 권위를 어떻게 복원시켰을까?

  히로히토는 스포츠야말로 ‘국민의 상징’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극대화하는 최적의 ‘국민 통합’ 방책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국민적 스포츠 후원자’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국민적 단결’을 목적으로 1946년부터 일본체육협회가 ‘국민체육대회(국대)라는 전국적인 아마추어 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했는데, 그 제3회부터 종합적으로 가장 많은 우승자들을 낸 지방에 ‘천황배(杯)’가, 그리고 가장 많은 여성 우승자를 낸 지방에 ‘황후배(杯)’가 각각 ‘하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4회 ‘국대’부터는 친히 관람해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전범 중의 전범이었던 히로히토가 이제는 ‘평화로운 스포츠 애호가’로서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국내외에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사진들을 보면, 관중은 천황과 황후를 향해 그야말로 외경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1945년 이전에 특별한 제단에 봉안된 사진으로만 ‘뵈올 수’ 있었던 ‘그분’이 이렇게 ‘서민적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시민 사이로 다가오자 “과연 나의 가족이 왜 전쟁터에서 죽어야 했느냐”는 질문을 하려는 마음이 절로 녹는 것이었다.

  1958년에 일본이 아시아경기대회를 도쿄에서 개최한 것은, 경제가 부흥한 새로운 위상을 과시해 올림픽 유치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때에 1964년의 올림픽을 도쿄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1960년 6월에 미-일 안보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격렬한 데모에 30만 명 이상이 나서는 등 그 당시 일본은 갈등투성이의 사회였지만 도쿄 올림픽은 국내외에 경제 부흥으로 윤택해진 일본 생활의 ‘다테마에’(建前·실제와 크게 다를 수 있는 표면적 모습)를 과시함으로써 알게 모르게 보수 쪽의 입장을 강화했다. 선수들이 흘리는 땀, 관객이 보내는 환성에 국가가 계산적으로 정치적 투자를 했던 것이다.

  스포츠란 개인이 심신을 스스로 ‘개조’해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근대적인 규율성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여가 활동이다. 따라서 스포츠에서의 주도권을 국가와 자본이 장악할 경우, ‘자율적 개인’이라는 또 하나의 근대적인 꿈은 산산조각 나게 된다. 그러한 그늘을 우리는 일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그늘은 역대 권위주의 정권에 이용돼온 한국 스포츠와 무관하지 않다. 과연 군부에 의해서 태권도가 만들어지고 보급됐던 것은, 1945년 이전에 일본 유도의 창설과 보급의 동기와 그렇게 달랐는가? 과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학교 체육 수업의 형태는, 일본이 1880년대 후반부터 진행해온 군사주의적 훈육을 많이 벗어났던가? 그리고 최근의 월드컵까지 각종 스포츠 이벤트의 관(官) 쪽 이용 형태는, 1940년대 후반에 히로히토가 벌였던 ‘쇼’들과 과연 달랐던가? 일본이란 거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명확히 볼 수 있다.

-박노자 <천황, 스포츠국가를 세우다>에서

Posted by pop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