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서 표현주의는 작가가 자신의 개인적 감정(흔히 불안, 공포, 고통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 비자연적인 색채를 사용하고 형태를 왜곡하는 양식을 의미한다. 표현주의 회화는 19세기 말 자연주의와 인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상징주의, 아르 누보와 관련해서 주관주의의 일면으로 이해된다. 즉 극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간결하고 명료한 형상과 강렬한 색채를 통해 대상을 묘사하는 회화와는 달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다. ‘표현’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티스지만 표현주의 그림을 먼저 그린 사람은 뭉크일 것이다. 그는 반 고흐, 고갱, 앙소르 등과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칭송받는다.
뭉크처럼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착한 화가는 드물 것이다. 그가 외부세계보다 내면세계에 집착하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경험과 불안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폐결핵으로 잃었으며 자신도 병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죽음의 가정으로 기억했고,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을 경험했다. 진정한 탄생, 즉 '죽음'이라는 존재가 나를 기다린다’고 고백했다. 그는 끊임없이 죽음을 의식하고 있었고 이런 의식이 그대로 그림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뭉크의 미학은 한마디로 ‘혼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혹은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을 고백의 형상들로 창조해냈는데, <절규5>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만화처럼 과장하고 왜곡시켰다. 몸을 비틀면서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인물은 과연 무엇에 놀란 것일까? 원근법을 사용하면서 화면을 큰 경사로 단절시키는 다리와 난간, 후방의 가늘고 긴 두 사람, 황색·적색·청색에 의한 다이내믹한 필치, 강에 떠 있는 두 척의 배 이외에는 세부를 생략한 표현 등은 극적 효과를 드높인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인의 불안에 공감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평온한 가운데 돌연 누군가에 의해 습격당하고 그리고 주변은 변함없이 평온하게 느껴질 때, 현대인의 불안이 한층 더해지고 그에 따라 현대인은 체념하여 절규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힌다. 뭉크의 작품에서 절규하고 있는 이와 원경의 인물의 무관함은 이러한 상황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불안한 현대인의 공감을 자아낸다.
정신적 동요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물론 더 나아가 기억의 형태까지도 변화시킴을 우리는 뭉크의 그림에서 알 수 있다. 이는 표현주의가 추구하는 점이기도 하다. 뭉크의 그림들은 전통을 무시한 새로운 양식의 회화이며 표현이 매우 강렬해서 회화가 결국 표현임을 충분히 웅변하고 있다. 표현주의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기 10년 혹은 그 이전에 이미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하고 있는 그는 표현주의의 선구자임이 틀림없다.
-김광우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