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통일신라 중대(中代)의 불상을 한국미술사의 고전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상화된 인체 묘사, 자신감 넘치는 역동적인 선은 후대까지 미술 창작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불상이나 보살상도 나름의 미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세련된 미적 완결성을 추구하던 통일신라기의 불교미술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불상은 대형화 추세를 보인다. 높이 18미터의 관촉사석조보살상은 이러한 흐름을 웅변해 준다. 이 석상은 규모 면에서나 돌덩어리처럼 단순한 형체 면에서 영국의 스톤헨지를 연상시킨다. 거대한 석상의 또 다른 예로 마애불이 있다. 높이 13미터에 이르는 덕주사 마애불은 얼굴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만 얕은 부조를 하고 나머지는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이들 거대한 석조불상은 통일신라기에 비해 조형적 완성도는 떨어진다. 관촉사석조보살상의 경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寶冠)* 위에 풍경이 달린 천개(天蓋 : 뚜껑처럼 생긴 넓적한 돌)를 덮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고 얼굴이나 신체에도 이전 시기의 조각에서 볼 수 있던 굴곡과 양감이 표현되지 않았다. 덕주사 마애불도 밑그림을 바탕으로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린 도상(圖象)만 강조되었을 뿐 조각으로서의 입체감이나 공간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다.
이러한 불상들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석불들의 특징을 보여준다면, 한송사 석조보살좌상은 강원도 일대의 특수한 지역 양식을 보여준다. 높은 원통형의 보관과 장신구, 눈썹밑을 깊이 파서 눈두덩이와의 경계를 분명히 한 점, 작고 합죽한 입매, 좁고 가파른 어깨와 통통하고 둥글게 처리된 몸매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지방마다 고유색이 강한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점이 고려 시대의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그런데 지방색이 강하면서도 크고 소박한 불상을 양산한 지방과는 달리, 중앙에서는 세련된 고려청자에 못지않은 우아하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쪽 다리를 세우고 팔을 그 위에 얹어 편안한 자세를 취한 이 보살상은, 갸름한 얼굴과 가늘고 긴 팔다리, 여윈 듯이 보이는 몸통의 굴곡이 인상적이다. 또한 두 팔을 휘감아 내린 천의(天衣)나 화려한 보관과 구슬 목걸이로 치장되어 있어 당대 귀족들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고려의 불상 가운데는 과연 우리 나라 작품인지 한 번쯤 의심하게 하는 것들도 있다. 금동대세지보살좌상은 삼중 연꽃 위에 단정하게 정좌한 모습인데, 둥글고 큰 귀고리, 가슴까지 올라온 천의와 매듭이 티벳특유의 보살상과 비슷하다. 또한 인체의 양감이나 곡선미보다 장신구의 기계적인 장식에 치중하였고, 목걸이에서 늘어진 구슬들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좌우대칭에 가깝다. 같은 계열의 조각이지만 이보다는 고려적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예도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의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호암미술관의 금동관음보살좌상 등이 그것인데, 이들 두 불상으로 미루어 몽고 미술이 고려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지만 고려화도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전 시기에 걸쳐 어느 하나의 잣대로 균일하게 평가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모습의 불상들이 제작되었다. 불상 조성을 위해 시주한 사람들의 계층이 매우 다양해졌고, 사람들이 갖가지 마음으로 불상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대중화만큼 불상 조성의 대중화가 이전보다 훨씬 폭넓고 뿌리깊게 이루어진 셈이다.
*선각(線刻) : 선을 파서 형상을 만듦.
*보관(寶冠) : 불상 머리에 훌륭하게 꾸민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