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구에서는 미술의 3차 혁명으로 불리는 인상주의의 대두로 미술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재현의 전통 위에 구축된 시각 예술의 인습과 규범들을 본질적으로 뒤바꿔 놓은 것이다. 혁명의 생리가 그렇듯이 비워낸 테이블은 당대의 현실에 맞는 새로운 개념들로 채워지게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독창성’이다. 그것은 새로운 전통을 구축하는 기관차가 되었고, 지나치는 역마다 새로운 시대를 풍미할 손님들을 태우고 실어 날랐다. 나아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시대에는 ‘독창성’은 작품에 관한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되었다.
예술의 영역에서 모더니스트들은 독창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그것은 모더니스트들은 하여금 추상화(抽象)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이것은 화가들이 현실공간의 재현 대신에 화면의 순수 조형적 형식을 찾아 나섰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들에게 있어 모방의 대상은 더 이상 자연물이 아니라 자연의 배후에 담긴 추상적 개념과 그 구조적 형태였다. 그런데 모더니즘 미술가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극단적인 추상화의 길에 빠져들었고 현실을 지나치게 외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그에 따라 독창성의 문제, 즉 예술의 순수성과 고급성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게 된다.
1960년대 이후 미술가들은 모방과 차용의 개념을 다시 본격적으로 예술의 무대 위에 주연처럼 등장시키게 된다. 일상적 현실을 재현하려는 예술가들은 새로운 현실인 산업사회의 광고 이미지들과 대량생산된 기성용품들을 그들의 예술 영역 안으로 차용하였다. 그들은 모더니즘 이전의 고전주의 또는 그 이전의 미술과 연계성을 주장하면서 역사, 종교, 신화 등의 줄거리들을 거침없이 예술의 울타리 안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면 현대 미술에서 독창성을 대신할 수 있는 모방과 차용의 밑바탕은 무엇인가? 그것은 차별성이다. 차별성은 자기중심적이거나 유아론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의미로 사용되는 독창성의 개념과 다르다. 자신을 타인의 그것과 비교 분리하여 내세우는 성질이면서도 타자를 인정하는 관계 개념이다. 즉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나와 다른 그 자체로 인정하는 태도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술가들의 작품에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독창적이냐가 아니다. 어느 누가 역사와 환경 그리고 현대사회의 넘치는 정보의 바다에서 벗어나 작업을 할 수 있겠는가? 또 문명과 차단된 상태에서 작품을 생산하더라도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과의 타협과정에서 그 순수성을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표절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표절의 배경에는 모방과 차용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예술가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주체적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모방과 차용의 당위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들은 모더니즘 이후에 새롭게 대두된 예술을 규명할 수 있는 언어이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현대 미술의 자기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 김영호, <서구 미술에 나타난 모방과 차용의 역사 논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