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ARI의 희로애락

  1백50여개의 나라에 3천여의 문명과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계이다. 그러니 문명 분쟁과 그 충돌은 날이 갈수록 가속화할 것이 분명하다. 국경없는 세계가 될수록 문명의 정체성은 사활을 건 현실문제로 등장한다. 돈으로 상품도 기술도 국경없이 자유롭게 넘나들지만 언어와 생활 풍습과 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의 울타리만은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 정부의 문화 행정은 비상등을 울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산소가 희박해지면 먼저 그 위기를 경고하는 잠수함의 토끼하고 같은 기능을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글로벌한 환경속에서도 어떻게 한국인이 수천년 동안 누려온 문화의 동질성과 그 가치를 산소처럼 지키고 의식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등 여러 문화기관을 연결하는 공공 네트워크의 장치와 그것을 다시 직장과 가정 그리고 개인과 연결하는 생활 네트워크의 기반을 마련해 주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서 누구나 산소처럼 문화를 호흡하고 그 가치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를 이벤트화해서 감동을 함께 나누고 멀티미디어의 초고속 정보망을 통해서 수시로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사이버 문화시대를 열어야 하는 것이다.

  흔히 문화 이벤트를 일회성이라고 하여 그에 대한 투자를 낭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일회용품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다. 결혼식은 한번 치르는 일회성 의식이지만 죽을 때까지 영원히 남는 것 아닌가? 문화는 공동체의 영원한 기억의 축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행정이 묘지기에 그쳐서는 안된다. 훔볼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문화는 이미 만들어진 에르곤이 아니라 앞으로 그것을 창조해가는 에네르게이아여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 네트워크에 새로운 내용을 부가하는 것이 문화행정의 궁극적 목표여야 한다. 그래야만 안개등을 켜고 무적(霧笛)을 울리는 문화의 뱃길이 미래의 신대륙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서양의 축음기로 임방울이 부르는 한국소리를 틀었지만 오늘날에는 거꾸로 한국에서 만든 비디오 데스크로 마이클 잭슨과 할리우드 영화를 본다. 문화의 하드는 있는데 내용이 없는 탓이다. 산업사회의 국가 자원은 땅속에 있었지만 미래사회의 그 자원은 인간의 두뇌에 묻혀 있다.

-이어령, <문화에 비상등을 켤 때>에서


※ 에르곤 : 인간의 의사 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

   에네르게이아 : 사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끊잆이 되풀이 되는 정신의 활동.

Posted by pop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