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표현 창작의 자유에 대한 수많은 규제와 간섭의 그물망이 둘러쳐져 있다. 70년대의 장발단속에 열심이었던 경찰은 배꼽티를 비롯하여 신체를 지나치게 노출하는 행위에 대해 경범죄처벌법을 적용 단속하려다가 한발 물러서 지도장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유는 풍기문란 및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고방식에 있어 70년대와 전혀 다를 바 없이,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경범죄의 처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이상한 나라의 모습이다.
옷차림에까지 이처럼 신경쓰는 국가라면, 보다 예민한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직간접의 규제수단을 최대한 가동하고픈 파쇼적 발상이 팽배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출판물에 대한 직접적 규제는 물론 매우 축소되었고, 그 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대체로 향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날 필화(筆禍), 금서목록, 보도지침, 불온서적, 출판인 구속과 같은 용어로 지칭되던 험난한 시대는 아니다. 서점에 대한 압수수색, 시판중지 종용 등 유통단계의 통제는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만족스럽다는 것은 과거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고, 헌법조항에 걸맞는 정도는 여전히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전금지가 강한 검열이라면, 약한 검열 장치는 무수히 많다. 가령 얼마전 모방송에서 내린 ‘10대 가수 텔레비전 출연금지’ 결정도 한 예이다. 최근 10대 가수들이 폭발전인 인기를 누리는 가운데 시장의 90%이상을 장악하고, 음악은 급격한 템포와 화려한 군무를 동반한 10대 취향의 음악으로 재편되었다. 10대 가수들이 청소년들에게 패션의 모방, 가출 등의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논의된 모양이다. 이러한 10대 음악의 일방통행에 대한 대증 요법으로 방송사에서 내건 출연금지 결정은 참으로 기이한 나라의 풍속도의 또다른 단면이다.
외국가수들의 국내 공연에 정부의 공연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도 그렇다. 얼마전 뉴키즈 온더 블록이란 그룹의 국내 공연 중, 청소년들을 지나치게 많이 입장시킨 공연장에서 ,청소년들이 압사하는 비극이 발생한 적이 있다. 당시 언론은 청소년의 외국가수에 대한 과열을 매도하였다. 또 마이클 잭슨의 한국 공연을 둘러싼 시비와 파장도 그렇다. 아동에 대한 성추행자, 여호와의 증인 신도, 한물간 가수 등 별별 낙인이 마이클 잭슨에게 찍혀졌고, 그의 한국 공연을 반대하는 갖가지 대책위훤회가 구성되었다.
조금만 눈여겨 보면 우리의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정부가 직접, 혹은 국민 일부가 정부에 압력을 넣어 그만두도록 할 수 있는 방식은 그야말로 후진적인 잔재일 뿐이다. 이제는 그러한 잔재는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가위눌려있던 상황을 당연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는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보이는 장벽과 함께 보이지 않는 거미줄도 찾아 그로부터 벗어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국가의 역할이 후퇴한 뒤에 자유만 활개치는 것은 아니다. 자유와 그늘 속에서 상업적 이윤과 저열한 동기들로 무장한 온갖 독버섯이 피어난다. 그럴수록 국민의 책임량은 그만큼 늘어나야 한다. 타율적 결정을 국민들의 자율적 판단으로 전환시켜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껏 권리담론을 주로 해 왔지만, 공동체에서의 시민의 의무와 책임에 대한 논의가 소홀히 돌 때는 남용되는 권리만 존재할 뿐이다. 자기의 우선권만 주장할 때 전체 교통질서는 마비되듯이, 권리에 대한 주장은 동시에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의 자각과 비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검열과 자유와 책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