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툰이란 말은 이탈리아어 카르토네(cartone), 불어의 카르통(carton)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들은 두꺼운 종이를 뜻한다. 이것이 종이 위의 그림이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17세기 중엽에는 모자이크,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만들기 위한 밑그림이나 디자인을 뜻하게 되었다. 현재 카툰은 신문이나 정기 간행물에 나오는 글을 대신한 그림을 뜻한다. 카툰의 이러한 의미와 함께 신문이나 잡지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카툰을 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인지, 사람들은 카툰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카툰의 예술적 뿌리를 말한다면 사람들이 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카툰과 유사한 형태를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도 르네상스 예술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에서 말이다.
다 빈치의 <그로테스크한 5인의 얼굴>이라는 작품에는 다섯 명의 늙은 노파들(혹은 수도사들처럼 보이기도 한다)이 있다. 중앙에 있는 월계관을 쓴 사람을 놓고 주위의 네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의 분위기를 파악해 보건대, 도저히 올바른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마치 중앙에 있는 사람을 놓고 험담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일그러진 얼굴 표정, 때론 무표정한 얼굴, 박장대소하는 표정 속에는 조롱의 빛이 역력하다. 어떤 이는 네 명을 각각 인간의 네 기질을 희화화한 것이라고 보고, 중앙에 있는 노인은 다 빈치 자신을 희화화한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 다 빈치가 자기 성찰의 결과 그 어떤 것도 고대학자 이상으로 구현해낸 것이 없다는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로테스크한 5인의 얼굴>은 이것이 다 빈치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의 그림은 다 빈치에게서 충분히 예비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난 피렌체는 고대 플라톤적 이데아와 중세의 종교적 이상이 철학적 맥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이에 반해 다 빈치는 자연 현상에 대한 모든 것을 과학적인 실험 방법으로 정립하려고 했다. 동물학, 해부학, 수학적 방법들이 바로 그것이다. 동시에 그는 인체를 비롯한 모든 자연 현상을 사물의 움직임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는 동물들의 움직임과 인간의 표정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하였고, 그 결과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고정된 의미가 아닌 변화하는 물체의 특성, 동물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 감정을 표현하였다. 특히 그는 인간이 받아들이는 외부 자극에 즉시 반응하는 얼굴 표정에 주목했다. <그로테스크한 5인의 얼굴>은 그런 다 빈치의 경향을 웅변해 주고 있다.
그런데 <그로테스크한 5인의 얼굴>이 단순히 인간의 움직임이나 내면 감정만을 드러냈다면 카툰이라고 말할 수 없다. 카툰은 광대처럼 대상을 비웃고 희화화하거나 일상과는 일탈된 괴상하고 풍자적인 그림이다. 따라서 해학성과 풍자성은 카툰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다 빈치는 당시 알베르티가 <회화론>에서 주장한 ‘조화, 비례, 대칭’의 미적 원리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연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것만을 추려 낸다’는 선택 이론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으면서도, 미에 대해 어떤 차등을 두지 않고 모든 자연물을 동등하게 표현하려 했다. 이런 관점은 미와 함께 나타나는 추함도 그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미와 추의 대조를 통해 인물들의 실제와 같은 개성, 즉 살아 있음을 그려냈다. <그로테스크한 5인 얼굴>은 인간이 가진 추함을 인물들의 표정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일상적이지 않은 일탈된 해학 혹은 비아냥거림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다 빈치의 <그로테스크한 5인의 얼굴>에는 해학과 풍자라는 카툰으로서의 익살과 유머, 조롱이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인물의 특징이 개성에 맞게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런 점은 윌리엄 호가드에 이어지고, 19세기 최고의 풍자가인 오노레 도미에에 이르러 결실을 맺는다. 그런 의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카툰 역사에 숨은 선구자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모나리자>적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외에도 <그로테스크한 5인의 얼굴>적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될 때 카툰은 ‘대수로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일구 <카툰, 풍자로 압축시킨 작은 우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