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 그들은 불안하다. 컬트무비*에서 엽기적 광경을 훔쳐보며 축구장에서 광란의 폭력성을 분출한다. 또 현대인들이 즐기는 음악은 잡음과 소음이 혼합된 파열음이다. 현대인들은 어디론가 쉴 사이 없이 전화를 걸고 받는다. 뿐만 아니라 웃음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모든 것을 희화화한다. 그러한 현대인의 모습 속에는 안정감을 상실한 영혼의 뒤틀림이 있다. 도대체 이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불안은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인간 존재의 깊은 심연에 드리워져 있는 근본적 분위기다. 인간 자신의 존재가 어느 순간 한줌 존재의 무게도 지니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하데스**의 땅으로 추락할 허무한 순간이 예고 없이 닥쳐오며 그 순간을 어느 누구도 대신 떠맡을 수 없다는 사실, 더구나 이러한 사실들을 모를 수 없다는 앎의 불행, 바로 이것이 원초적 불안이라는 존재의 우수가 인간 내면에 숙명처럼 스며든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잘라도 어느새 고개를 다시 치켜드는 메두사의 머리처럼 불안은 인간을 끈질기게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물론 인류는 불안과의 대결을 처절하게 벌여왔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인들은 불안에 대항하기 위해 용기를 과장하였고, 그리스의 영웅전은 불안에 떠는 삶의 비겁한 모습을 죽음과 결연히 싸우는 비장미로 장식하여 불안을 떨쳐내려 한 신화이기도 하다. 또한 중세는 불안에 빠진 인간을 전능한 하느님이 동정해 주기를 영혼 바쳐 갈구함으로써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 하였다. 그리고 과학기술로 불안을 떨쳐 내려는 현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멀티미디어 정보통신 기술을 선사 받았다. 섬세한 상황제어 능력을 과시하며 세상을 매혹적인 시각적 이미지와 가상현실로 채색하는 이 현란한 테크놀로지는 실로 그 존재의 우울을 마비시킬 수 있는 구원의 기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현대인은 그토록 불안할까? 매우 역설적이게도, 불안을 장악하고 마비시키는 그 최첨단 기술에 오히려 그 불안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잠복하고 있다. 우선 정보화 시대에는 천문학적 양의 정보가 생산되고 저장된다. 그 파장 효과는 이제 양과 속도에 있어서 우리 삶의 대응 속도와 예측 능력을 엄청난 격차로 추월해 버렸다. 또한 정보화는 우리의 삶을 허무주의 속으로 방치하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의 시장 침입으로 전 삶의 영역이 전지구적 규모로 시장화되었다. 그 결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품으로서만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는 팔릴 때만 결정된다. 이제 가치는 없고 가격만이 있을 뿐이다. 또 진리는 없고 순간적으로 검색 가능한 정보만 있을 뿐이다. 현대는 삶으로부터 가치 그리고 진리를 거세해 내는 허무주의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현실은 이제 급격한 변동 속에 그 위험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었고, 삶의 심연에 드리워진 원초적 허무주의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우리의 불안은 방향상실의 좌절 속에서 더욱 더 짙어지고 그 고통의 비명은 한층 더 증폭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이 용납할 수 없는 역설로부터 탈출구는 있는가? 인간존재의 근본 분위기가 불안으로 채워져 있다면 불안으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불안을 추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최첨단 수단 때문에 그것이 증폭되고 있다면, 그 증폭된 만큼의 불안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진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허무주의에 방치된 삶의 의미를 사색하고 파열의 위기 속에 처해 있는 자아를 보듬음으로써 불안을 다스리고 진정시키는 반성력을 회복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인간이 지금까지 몸담지 못했던 더 많은 가상적 세계를 열어 줄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자아를 보듬고 허무주의를 넘어서려는 사색이 기술의 발전만큼 깊어지지 않는다면 암울한 불안의 먹구름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이종관 <현대인은 왜 더 불안해할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