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산술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100m 올림픽 육상 경기에는 세 개의 메달만 걸려 있다. 하지만 지금은 1896년 당시보다 무려 50배나 더 많은 선수들이 이 메달을 차지하기 위해 달린다. 또한 각 나라의 인구도 19세기보다 평균 다섯 배나 늘고,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있는 고학력층도 100배나 늘었지만, 어디서도 대통령을 다섯이나 백 명을 뽑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두 번째 이유가 훨씬 더 중요하다. 최근 경쟁이 노동시장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욕망을 지배하고, 더 나은 세계에 관한 만병통치약으로 찬양되고 있다. 그렇게 되면서부터 자신이 승리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수십 배나 늘어났다. 20세기 문턱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 사람들은 가난과 굴종을 바꿀 수 없는 질서나 하늘이 정한 이치로 생각하며 패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경쟁에 대한 맹신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낙오하고 패배의 쓰라림에 울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고전적인 위안이 있기는 하다. 내가 실패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 구조와 썩은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도 있다. 바로 기회의 균등이다. 당신이 진정 능력이 있고, 출세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열등감과 자책감이 생겨난다. 예전에는 거의 존재하지도 않았고, 어떤 가난한 사람도 느끼지 않았던 감정이다.
지구는 좌절의 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운이 겹치고, 운명에 할퀴고, 로또 복권은 번번이 비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좌절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만인 대 만인의 경쟁에서 늘 선두권에 서지 못하고 뒤처지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종(種)’으로서 인간은 진화의 무수한 굴곡을 넘어온 고독한 승자이지만, 개인으로서 인간은 대부분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아름답게 살 수 있다. 바로 저 마루쿠스 포르시우스 카토처럼 산다면 말이다. ‘승리는 신들의 것이고, 패배는 카토의 것’이라는 그의 말. 이 말에서 난 패배를 비극으로 승화하는 위대한 패배자의 모습을 본다.
-볼프 슈나이더 <위대한 패배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