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다시 엎드려 생각건대 당 현종이 안록산의 난에 나라를 거의 빼앗길 지경에 이르자, 그의 호위군인 진현례의 간언(諫言)에 따라 창황한 피난길 가운데서도 양국충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매어 달고, 임보의 시체를 끌어내어 부관참시를 하였사옵니다. 그러자 민심이 돌아오고 이광필과 곽자의 같은 신하들이 힘을 다해 역적을 몰아치는 공을 세웠던 것이옵니다. 이와 달리 송(宋) 고종 같은 이는 강남으로 천도한 뒤에도 이강이나 장준 같은 신하의 말을 듣지 않고 적과 내통한 진희 같은 무리를 가까이 하다가 마침내 악비 같은 장수를 죽이는 데 이르렀사옵니다.
천지가 순화되는 이치를 보시옵소서. 한 해의 풍년을 이루게 하는 것은 비바람과 이슬과 서리와 천둥과 번개가 봄이면 만물을 살리고 가을이면 성숙하게 하는 일을 순조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만물은 질서에 맞게 나고 자라고 맡은 일을 해내어 천지의 덕을 온전히 누리게 하옵니다. 임금이 만백성에 임하는 도리는 마땅히 천지가 만물에 대하여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것과 같이 하여야 하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신상필벌(信賞必罰)하여야 하옵니다.
요즈음 소인배들이 조정에 앉아서 선량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 박해를 하다가 마침내 저 대적을 만나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어느 한 사람 처벌받지 않았사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오히려 적군을 막는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을 부리려고 하였으니, 이는 적군이 들을 때에 기쁜 소식일 것이며 한편으로는 비웃을 일이옵니다. 이렇게 하여 가지고 어찌 백성의 사기를 진작시키어 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겠사옵니까?
옛날 제갈량이 말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모두 똑같으니 상벌을 시행하는 데 달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사옵니다. 전하께서도 지금 계신 한 지방에서 안주하지 않고 왜적을 무찔러 나라를 회복하시려거든 저 간신들의 머리를 베는 일을 아끼지 마시옵소서. 저 한 고조가 가장 미워하던 옹치를 제후에 임명하여 부하들의 불신을 해소했던 것처럼 전하께서도 평소에 비록 못마땅히 생각하던 자라도 공이 있거든 벼슬이나 상을 내리시는 데 인색하지 않으신다면, 나라를 걱정하는 신하가 목숨을 바쳐 그 뜻을 이어받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사마양저가 군율을 세우기 위하여 군율을 어긴 왕의 사랑하는 신하를 죽인 사실을 생각하시옵소서. 또 하찮은 종이라도 공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시어 우러러보는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소서. 이리하여 권위를 가진 임금의 명령이 한강의 남쪽 지방까지 미치게 되면 성상의 위엄과 은혜가 마치 사시절이 어김없이 교체되듯 하여, 용사들은 스스로 전쟁에 뛰어들어 공을 세울 것이고 백성들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기가 할 일에 종사할 것입니다.
-조헌, <의병을 일으키고 난 뒤의 상소(起兵後疏)>에서
*부중(府中):재상이 근무하던 관아. 또는 단순한 지방 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