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영국의 ‘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영국에게 인도를 넘겨준 것은 물질적 성공, 산업발전과 같은 ‘영국적인 것’을 바라는 인도인들의 마음이라고 보았다. 동인도회사가 처음 설립될 때 인도인들은 돈을 벌러 온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단숨에 돈을 벌고 싶어 영국상인들을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영국군대는 이 상업활동을 보호하기위해 뒤따라왔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영국처럼 산업강대국이 되길 바라면서 동시에 영국이 물러나길 바란다면 인도독립이란 그저 “영국인 없는 영국식 통치”일 뿐 진정한 스와라지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인도인들이 “호랑이는 원치 않으면서 호랑이의 본성을 원하는 한”, 다시 말해 ‘영국문명’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한 인도자치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간디는 인도가 식민지가 된 것은 현대문명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부추기는 현대산업문명으로 사람들이 오로지 육체적 안락과 경제적 이윤만을 추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철도의 발달로 물건을 더 비싼 시장에 내다팔게 되었고, 증기기계의 도입으로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웃과 가족을 아끼는 대신 ‘돈’을 섬기게 되었고, 더 잘 입고, 더 많이 돌아다니고, 더 많이 축적하는 것이 문명이라고 믿는 현대적 미신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 미신에 빠지자 인간영혼은 고독하게 병들고,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그악스러워지고, 몸은 끝없는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 간디는 이런 현대문명이야말로 마치 상처가 눈에 띄지 않아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믿게 되는 폐병처럼 겉으로는 매력적으로 보여도 결국은 인류의 공멸을 가져올 악이요, 질병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식민지적 억압과 산업문명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그 방법은 영국산 면직물을 거부하고 인도의 전통적인 가내수공업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또한 독과점으로 높은 세금을 물리는 정부의 소금을 거부하고 직접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소금을 먹는 것이다. 식민지의 근간인 산업자본주의에 협조하지 않는 길은 민중 스스로가 생필품은 자급자족하고, 이웃끼리는 사랑으로 돌보고, 개인의 영혼은 명상과 청빈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랫동안 내려온 민중들의 이런 자립과 자치의 삶의 기술을 되살리는 것이 바로 간디가 말하는 비협조, 비폭력의 저항이다. 간디에 따르면 내 안의 ‘영국’은 사랑을 담아 가족들의 빵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 때 몰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간디는 결코 산업화나 경제성장으로 인도가 식민지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최대다수의 최대 선’이 아닌 모든 인류가 고르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궁극적으로 마을 단위의 자립과 자치를 이룩해야하고, 산업사회가 아닌 농업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간디가 말한 스와라지를 이룩했는가? 한 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아일랜드가 영국과 같은 대공업국이 되고자 한다면 결국 아일랜드는 망할 것이다. 진정한 독립과 행복은 공장의 굴뚝연기가 아니라 늦가을 가을걷이하는 곳에서 나온다.” 간디와 예이츠의 지적이 왜 이리도 가슴을 아프게 파고드는가? 문득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박혜영 <우리는 문명의 식민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