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고려는 야만시하던 몽골족의 침입을 받아 30여 년간의 치열한 항쟁을 벌였으나 굴복하고 말았다. 고려는 장기간의 항전 과정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고, 수많은 문화재들도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마침내 몽골족과의 굴욕적인 타협으로 인해 국가의 자주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한문과 불교를 문명의 상징으로 자부하던 고려인들의 뇌리에 이러한 항쟁과 패배의 역사적인 시련은 뼈아픈 기억으로 강하게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고려인들은 패배의식에만 빠져 있지 않았다.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 이전에도 고려에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가 있었다. 그 동안 정사(正史)로 인정받고 있었던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야사(野史)로 평가가 낮게 내려졌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현실정치의 교훈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역사적 사실을 취사선택했기 때문에 정치 위주의 무미건조한 역사서였다. 또한 그것은 신이한 설화 형태로 전승되던 많은 고대 사료를 분해하여 기전체(紀傳體)라고 하는 역사서의 전형적인 편집체제에 맞추거나 화려한 한문체의 문장으로 개작함으로써 그 자료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에 반해 <삼국유사>는 정치사에 관한 사실 가운데 <삼국사기>와 다른 내용의 사료들도 함께 제시해 주는 한편, <삼국사기>에서 지나쳐 버린 고대의 사회습속과 신앙을 다양한 자료를 통하여 보충해 줌으로써 <삼국사기>보다 역사이해의 폭을 크게 확대시켜 우리가 고대의 역사와 문화의 총체적인 모습에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삼국유사>는 표준적인 역사서로서의 정사체(正史體)나 고승전(高僧傳)류의 편집체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항목을 설정하고 자료를 분류하고, 또한 신이한 설화들을 원형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고대 문화를 좀더 원형에 가깝게, 그리고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삼국유사>에 보이는 한국의 고대사 체계는 전체적으로 일정한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고조선으로부터 삼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가와 정치세력들을 잡다하게 나열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통해 당대인들은 나라 최초의 국가로서 고조선과 그 시조로서의 단군에 대한 인식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다. 단군을 평양지방의 지역신으로 이해하는 데 머물던 <삼국사기>나 묘청(妙靑)의 역사인식에 비해 <삼국유사>의 역사 인식은 크게 발전된 것으로 당시 고려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적 배경이 바탕을 이룬 것이다.
한편 유교주의적 사대사상에 입각해 찬술된 <삼국사기>와 달리 불교사관이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는 <삼국유사>는 당시 백성들에게 문화적인 공동체로서의 긍지와 자주정신을 드높였다. 일연은 고려가 오래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땅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몽골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불교적인 영험담을 통하여 혼란한 민심에 강렬하고 건전한 신앙심을 불어넣음으로써 문화적인 저항의식을 북돋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연은 [세속적인 명리만을 좇거나 사치를 일삼는 부도덕한 승려들에 대해서는 강렬하게 비판하면서도, 권력과 등진 은일고사(隱逸高師)들의 행적은 열심히 채록하여 아름다운 일화로서 오늘에 전해주고 있다. 또한 일반서민과 노비들의 신앙 사례 등에 따뜻한 애정의 눈길을 기울여 노비들의 출가수행 사례와 극락왕생 설화를 전해주고 있다.] 그의 호국불교 사상은 단순한 이데올로기 강화 수단이 아니라, 불교적 공동체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자주적인 근대화에 실패함으로써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야 했던 불행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고유한 문화 전통은 단절되었고, 한 때 근대화를 곧 서구화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 적도 있었다. 오늘날에도 세계화 국제화가 역사적인 과제가 되면서 전통문화는 오히려 선진화의 걸림돌로 인식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리고 또한 개혁과 변화가 시대적인 화두가 되면서 과거의 역사는 오직 비판과 청산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몰개성과 획일성의 풍조가 확산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만큼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중요해진 때는 없었다. 오늘날의 사회 모순과 문화적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 문화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한 <삼국유사>는 우리에게 훌륭한 안내서가 될 수 있다. 특히 한국문화의 뿌리를 이해하고, 나아가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라면 재독, 삼독하면서 저자 일연과 반복적으로 토론할 기회를 갖기를 권한다.
-최병헌 <삼국유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