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현대를 테크놀러지 시대라고 한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이해가 타당성을 잃어 버린지 오래 되었다. 기술은 도구의 지위를 넘어 역사적 현실을 조직하고 재분할하는 중심의 자리에 진입했다. 이제 자율적 진화의 논리를 획득한 첨단 기술, 특히 첨단 정보 기술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문화적 영역을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자본의 창출과 집중, 사회의 조직과 편성, 인간의 감각 사용 비율과 감수성, 심지어 과학적 탐구의 방향마저 기술로부터 시작된 발전의 논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사이버 공간이 그 영토를 넓혀 가고 있는 테크놀러지 시대를 살고 있다.
(다) 테크놀러지 문명도 기존의 형이상학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테크놀러지는 이론적 사유를 근간으로, 이론적 사유는 플라톤 이래의 서양적 형이상학을 모태로 한다. 그러나 테크놀러지 시대에 형이상학적 존재 이해는 그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실현하는 동시에 새로운 존재 이해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 과거화된다. 플라톤주의적 전통에 대하여 테크놀러지 시대는 고비의 지점, 위기의 지점, 전환의 지점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기술이 확장시켜 가고 있는 이 시대의 특이한 토질에서 과거의 사상, 과거의 사고 방식은 고사될 지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크놀러지 시대는 궁핍한 시대이고, 과거의 사상이 번식하기 어려운 황무지라 할 수 있다.
(라) 기존의 형이상학을 모태로 하는 첨단 기술이 마침내 그 형이상학의 울타리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 시대의 가상 현실과 시뮬라크르들에 의하여 가장 탁월하게 예증된다. 그것들은 기존의 존재론이 해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실재가 아니면서 비실재로 치부할 수도 없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구도에서 가상 현실의 가상성은 규정 불가능하다. 그 규정 불가능성은 어떤 고정된 의미의 실재성을 전제하는 과거 존재론의 한계를 드러낸다.
(마) 이 한계의 지점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그 한계적 사태를 포괄하는 새로운 사고 방식, 새로운 원근법과 관점을 쌓아 올릴 때만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새로운 사유의 파종,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가상적 공간이 무한대로 뻗어가고 있는 이 시대가 기존의 철학에 대하여 황무지라면, 이 이질적 토양을 개간하고 거기에 적합한 사유의 씨앗을 키우는 일이 사상사적 과제이다.
-김상환 <사이버시대의 존재론적 이해를 위하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