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많은 위기를 느끼고 있다. 그 위기는 이성과 감성, 사유하는 인간과 기계적 자연계 등으로 나눠 세계를 파악하는 이원적 사유구조와, 심한 경쟁 사회에서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둔 인간의 욕망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때 적잖은 학자들이 동양의 전통적 수양에 관심을 돌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 들어가는 좌선(坐禪)이나, 눈을 감고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명상(冥想) 등을 권장하고 있다.
수양은 이원적 인식론을 극복하는 실천적 원리를 제공할 수 있다. 이는 배타적 이원론이 이성(정신, 영혼)과 감성(육체, 물질)의 이원적 대립을 전제로 하는 반면, 동양적 수양은 이런 대립을 초월하는 영육(靈肉)의 근원적 통일에 대한 관점에 기초해 있고, 실제로 그 조화를 유지하는 실천적 방안들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수양을 통해 우리는 이성을 중심으로 삼아 감성을 배제시켰던 소위 ‘인식지배의 패권’에 대해 반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체주의나 몸의 철학이 감성 및 육체적 욕구의 해방이라는 또 다른 극단에 경도(傾倒)되는 부정적 경향을 견제할 수 있다.
그리고 동양적 수양은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고, 만물과 내가 한 몸이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를 통해 세계의 통일적(유기체적) 본성을 보다 직관적으로 자각할 수 있다. 수양은 사람과 자연계와의 일체감을 크게 고양(高揚)시키며, 외부세계를 더 이상 자기와 분리된 기계적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게 한다. 그리하여 자연을 대상화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인간과 자연의 대립, 갈등이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동양적 수양은 대체로 인식활동, 감정, 욕망을 잠재우고 몸과 마음을 비우는 것을 요체(要諦)로 한다. 혹자는 이런 수양이 자아의 측면에서 지나치게 억압, 정태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수양은 대자연의 활력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는 길을 제공한다. 이것은 금기를 통해 욕망을 통제하는 그 어떤 시도보다 실현가능성이 높고 효율적이며, 자신을 잊고 전체 우주와 하나가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대단히 자유롭고 역동적이다.
오늘날 정신과 육체의 건강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양에 참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고 있다. 실제로 좌선, 명상 등의 수양은 현대문명의 위기로 인해 피폐(疲斃)해진 사람들이 심신을 회복하는데 매우 큰 효과를 보인다. 여타의 운동이나 종교활동이 육체나 정신의 어느 한 부분에 치중한다면, 좌선․명상 등은 육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수양을 통해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실조(失調)를 동시에 바로잡아 주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동양의 수양문화에는 분명 어두운 그늘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는 이념과 가치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긴 사대부 계층은 이것을 무기로 삼아 이른바 쌍것들에게 제 몸을 다스리는 데에만 힘쓰도록 가르쳤다. 제 몸도 다스리지 못하는 녀석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문제나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문제를 건방지게 들먹일 수가 없다고 못박아 버렸다. 오로지 제 몸을 다스리지 못한 죄로 민중들은 사대부들의 부림을 달게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수양전통의 회복을 검토하게 되는 것은 현대문명의 한계가 보다 뚜렷한 현실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는 대상 세계에 대한 외향적 갈구(渴求)에서 내면적 덕성의 수양으로 가치중심을 옮겨야 할 것이다.
-김성환 <수양의 현대적 의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