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이해하고 한국사가 갖고 있는 의미를 추구하고자 할 때 어떤 입장에서 역사를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다르고 해석도 상이하게 된다. 한국의 역사는 분명 하나이지 둘은 아니다. 지역으로 보든가 민족으로 보든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서 역사를 갖고 있다. 독립적 단위라는 그 점만을 강조하고 부분이나 전체적인 연관성을 외부와 고립시켜 역사의 내적 발전을 구성하게 될 때 민족국가사 또는 특수사가 된다. 반대로 세계사가 형성된 넓은 시야에서 한국사를 연결시켜 역사의 발전과정을 세계사의 원리와 맞추어 해석하고자 할 때 일단은 보편사가 된다. 우리가 한국사를 올바로 파악하자면 위에서 말한 민족국사도, 그리고 보편사도 어느 하나만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한국사를 이론적으로 파헤친다고 해서 서양사가 갖고 있는 시대구분법이나 유물사관의 각도에서 우리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반드시 무리한 결론이 될 것이다. 어느 지역의 역사도 고립된 채 발전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우리의 역사가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독립적 단위이고 그래서 존재적 발전과정을 충실히 서술했다고 해도 대외적으로 시야를 넓히지 않으면 편견과 독단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국사의 특수성을 지나치게 과거를 찬양하게 될 때 본래의 모습에서 이탈된 미화 작업이 된다.
우리의 역사에는 분명히 독자적이고 특수한 사실이 있다. 신라의 화랑도나 원효의 사상은 타국의 역사에는 없다. 한국사의 서술에서 위의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신채호는 심지어 한국사의 전체 이해를 화랑이라는 娘家思想(낭가사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를 연구할 때 원효의 사상은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개개적인 특수성은 한국사에서는 거의 절대적인 요소들이고 또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불교를 연구할 때 우리 나라 안에서 전개되었던 사건들이 정리되고 거기서 일정한 체계를 세워야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불교가 우리 나라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고 적어도 동아문명이라는 지역 속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인접국가의 문화와도 비교가 이루어져야 한되. 좁게는 우리 나라의 사상 속에 불교가 점하는 위치가 규명되어 하고, 더 시야를 넓혀서는 동아문명 속에서 불교가 역사에 끼친 사회 현상이 이해되어야 한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서양의 사상이 대조적으로 비교될 때 불교는 동양문화의 거대한 조류로서 부각되어진다. 이러한 각도에서 민족국가사가 연구되어야 지난날의 쇼오비니즘(chauvinisme)으로 흘렀던 역사가 시정될 수 있다. 오늘의 세계사적 흐름은 어느 역사도 고립과 단절 속에 역사가 진행되거나 해석되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며 세계의 흐름 속에서 민족의 역사가 지니는 의미가 포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세계사를 의식한 나머지 우리 역사의 기둥이 될 만한 사건이나 인물이 무시되고 세계사적 법칙이나 놀리 속으로 우리의 역사가 요리된다면 우리의 역사는 보편성이란 미명하에 단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법칙성이나 논리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역사성 위에서 간추려진 결론이며, 세계사적 원리가 구석구석의 어느 지역 어느 민족에게나 적용되는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는 신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움직인다는 데서 사회법칙상 보편적인 원칙이 나타날 수 있다. 유사이래로 인간이 만든 도구를 예로 든다면 물질적인 면에서는 인류가 직선적 발전을 거듭했다고 할 때 긍정적 반응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발전이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고는 누구도 말을 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역사에 보편성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세계사를 움직여 온 背面(배면)의 원리 중에 어떤 것은 한국사와 관계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로 한국사는 지금가지 충실했던 객관적 史實(사실)의 규명이란 토대 위에서 내적 발전의 열쇠를 찾고 그와 같은 역사적 상황이 세계사와 어떤 관계에서 종합이 될 것인가 하는 보편사와의 縱笛(종적) 橫的(횡적) 해석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김정배 외 2인 <한국의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