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조(廢朝) 때에 일어난 사건은 내시들이 일으킨 난리가 아니라 대신(大臣)*들의 음흉한 작란(作亂)에 의하여 연산군으로 하여금 거의 나라를 망하게 한 사건입니다. 그 연원을 생각해 보면 성종 초기에는 선비들을 육성하고 어진 신하를 좋아하여 그들의 간쟁(諫諍)을 잘 받아들이니, 그 당시 훌륭한 선비들이 모여서 요순(堯舜) 시대 같은 태평 세대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생각한 바를 숨김없이 다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 중에는 음흉하고 질투심이 강한 자가 많이 있어서, 속으로는 올바른 선비들에 대한 원망과 질투심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드디어 연산군 시대가 되자 임금의 뜻을 살금살금 엿보다가 마침내 자기들이 사사로이 품었던 분노를 풀어 버리기 위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그들은 훌륭한 선비들을 일망타진하여 남은 자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요즈음 풍속을 볼 것 같으면 벗들 사이에서 서로 왕래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기는 하지만 모두들 자기의 신분을 드러내기를 꺼립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 어찌 훌륭한 사람이 없겠습니까마는 그들은 직접 눈으로 참혹한 사건을 보았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스승이나 제자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른바 서로 왕래하면서 교제하는 사람들은 학문을 강론하고 자신을 수양하여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닦는 것인즉 이는 국가의 복입니다. 옛날부터 정직한 무리가 세상에 많으면 큰 화가 그 뒤를 따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보전하는 데 힘을 쓰고 세상을 원만하게 살아가려는 자는 감히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바른말을 하여 남의 원망과 분노를 사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머리를 움츠리고 이쪽저쪽 눈치를 살피는 것이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근심하는 자의 소행이 아닙니다.<중략>
세종 시대에 대신들은 집현전의 선비들과 서로 진지하게 토론을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년에 궁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만들자 대신들이 간쟁하여 듣지 않고 집현전 학사들도 역시 극간(極諫)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학사들이 모두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니 마침내 집현전이 텅 비었습니다. 그러자 세종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황희(黃喜)*를 불러 말하기를 “집현전의 모든 선비가 나를 버리고 떠났으니 어쩌면 좋겠소.”하시자, 황희가 이르기를 “신이 찾아가서 달래어 보겠습니다.”하고, 드디어 여러 학사의 집을 찾아 다니며 집현전에 나올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선비들의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만일 당시 세종께서 임금의 지위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황희같은 이가 그 당시의 정승이 아니었다면 임금은 틀림없이 집현전을 비운 선비들을 엄한 벌로써 다스렸을 것이며, 황희 정승 역시 두루 돌아다니며 머리를 숙여 간청하는 것을 굴욕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뿐입니까? 성균관의 유생들은 길에서 황희를 만나면 면전에 욕하기를, “승상께서는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사전에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충간하지 못하였단 말이오?”하였습니다. 그러나 황희는 성내지 않고 오히려 기특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대신의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종의 치적은 지금까지 일컬어져 내려옵니다.
*대신(大臣) : 의정부(議政府)을 통틀어 이르는 말. 정승
-조광조, <참찬관 때의 계문(啓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