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눈을 한국의 유․불․도(儒佛道) 사상에로 옮기고 보면 거기서 발견되게 되는 특징은 곧 ‘사상의 실용성’을 찾는 경향이다. 한국의 유불도의 사상은 그 수용기에서부터 우리 나름의 유용성에 따라 섭취․소화․운용되어 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점은 우리의 사상사를 일별하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유불도의 사상이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이른바 삼국시대이다. 그런데 삼국에 이 삼교(三敎)가 전래, 수용되는 데에는 각기 시차가 없지 않았고 약간의 양상의 차이도 없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지만 삼국이 이 사상들을 수용하던 태도 내지 방향은 대체로 일치하는 듯하다. 특히 분열된 소단위의 혈연적 부족사회에나 적합하였던 당시의 무속신앙의 풍토를 삼교에 의하여 개선함으로써,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제적 사회를 이루려는 방향으로 받아들인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물론 삼국에서의 삼교수용의 일치점 역시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특히 ‘정치, 사회의 발전’이라는 한 시각에서만 보더라도, 삼국은 다같이 삼교를 이용하여 무술(巫術)에 입각한 제정미분(祭政未分)의 분산된 부족사회를 탈피하고 왕권의 강화와 그 왕권지배의 국력강화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삼국에서 다같이 행하여진 듯한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논어 효경 중심의 유학교육’이 바로 중앙집권적 왕권강황의 증거이며, ‘율령의 개정 등을 수반하는 불교공인의 과정’이 또한 그 증거다. 연개소문이 쿠테타 이후에 행한 ‘도교의 응용’이나 신라의 ‘화랑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도술의 유행’은 이미 강화된 왕권하의 국력신장에 속하는 증거일 것이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의 경우를 보더라도, 삼교 사상의 전개가 각 왕조의 ‘실제, 실요성’의 방향에서 잘 이루어짐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신라를 붕괴시키고 고려를 일으키는 역사의 주역(주도세력)이 육두품(六頭品) 계층 및 호족인데, 그 주역들의 사상적 배경은 원시 선진 유학이 아닌 한당유학(漢唐儒學)이었으며, 교종 내지 선종계의 불교였음을 알아야 한다. 신라적 고대를 청산하고 고려적 중세를 여는 역사의 주역은 유학 중에서도 단순한 충효보다 좀더 관료제적 민본 위민 정치를 지향하는 한당유학을 응용하고, 불교 중에서도 보다 서민적인 선불교(禪佛敎)를 응용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라의 고대적 귀족사회를 무너뜨리고, 과학제도 등을 시행하는 중세적인 고려의 봉건적 관료 사회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불교와 한당유학으로도 더 이상 한국적 중세를 발전시켜갈 수 없다는 자각이 일어나, 마침내 이것들에 대처하여 수용하게 된 사상이 곧 여말 이후의 성리학이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이르자 당시 역사를 주도하던 엘리트들, 즉 중소지주층 출신의 신흥사대부들은 고려적 중세의 한계를 의식한 나머지, 이른바 ‘신유학’이라는 보다 더 민본 위민의 성격을 띤 동시에 형이상학적으로도 재구성된 성리학을 이용하여 양반무심의 보다 개선된 중세로서의 조선조라는 봉건적 관료사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전근대적 봉건 요소마저 탈각하고 근대를 지향한 사상이 조선 후기의 실학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거 한국의 유불도의 사상은 분명히 우리 나름의 필요성에 따라 우리의 조건에 맞게 수용하고 운용하였음을 의심할 수 없다. 사상의 실용성을 찾아 유효 적절하게 역사를 이끌어 올 줄 아는 뛰어난 힘이 우리에게 있음을 과거의 한국사상사가 증언하는 것이다.
-최동희 外 3인, <철학 개론-한국철학의 특징과 과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