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은 그 겨레의 삶의 흔적과 혼이 깃든 값진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말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우리가 살아온 삶의 무늬가 비밀스럽게 새겨져 있는 ‘굳은 저장판(하드 디스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 우리 겨레말이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깃든 고유어가 오랜 한자 문화권의 영향으로 대부분 한자어휘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와서는 일어와 영어를 비롯한 외래어와 뒤섞여 혼탁하게 변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ㅂ2ㅂ2(bye bye)’, ‘CU@K리그(K리그에서 보자)’와 같이, ‘외계언어’라고도 부르는 인터넷 언어까지 우리 겨레말을 잠식해 가고 있다. 겨레말의 문법 틀은 유지되고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 고유 어휘는 제대로 생존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밀려나고 있다.
게다가 언어의 통일을 위해 인위적으로 제정한 표준어 규정에 따라 많은 지역어와 생활현장에서 사용되는 상당수의 겨레말이 비표준어로 규정되면서 소멸이라는 운명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지도, 7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렇게 가다가는 결국 고유어는 거의 없어지고 자칫하면 한자어나 외래어 또는 인터넷 부호만 겨레말의 창고에 남게 되는 것이 아닐지 걱정된다. 일본의 경우 도쿄 야마노테선(山手線) 내부의 도쿄말을 표준어의 기준으로 삼다가 1948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상호소통이 가능한 도쿄 공통어를 표준의 근거로 바꾸었다. 메이지 이후 줄곧 정밀하게 언어 실태조사를 추진하면서 표준어 기준 지역인 도쿄의 도시 상황이 바뀌자 이를 근거로 하던 표준어 기준을 일대 수정하였다.
탈중심주의의 관점에서도 지역이 존중되는 시대이다. 지역말은 옛사람들이나 지역 사람들의 지혜와 슬기가 속속 깊이 스며 있는 값있는 문화유산이다. 고유어가 급격하게 줄어든 어휘 창고에 지역어나 생활 현장어를 새롭게 보충해 넣어 겨레말이 좀 더 살지게 해야 한다. 그리고 ‘경직된 규범 고수’보다는 ‘질서 있는 다원주의’의 언어정책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가기 위해 정밀하고 충실한 지역말의 실태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와 함께 ‘한겨레, 한 언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표준어에 대한 포괄적인 재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상규, <지역어를 살려야 겨레말이 산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