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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역 경신년 11월 9일 평양의 정양문 밖 선비 조흡(趙洽)이 땅을 파다가 거울 하나를 발굴하였다. 거울의 후면에 원형으로 스무 개의 글자가 철각(凸角)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동왕공(東王公)’ 등의 글씨를 판독할 수 있었다.
순찰사 박숙야 공이 이것을 얻어 가지고 매우 기이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여 발견한 내력을 대강 적은 뒤에 보물처럼 갈무리해 두었다. 그러자 평양에서 기자(箕子)가 쓰던 거울이 발견되었다는 소물이 평양성은 물론 온 나라에 자자하였다. <중략> 그 거울의 명문(銘文)이 둥글게 씌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글자로부터 시작하여 읽을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 관찰사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은 이것을 ‘동왕공서주회년익수민의손자오양음진자유도(東王公西周會年益壽民宜孫子吾陽陰眞自有道)’라고 읽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동왕공을 기자(箕子)로 생각하였고, 서주 회년을 서주의 주무왕이 맹진에서 제후를 모은 때로 풀이하여 지금으로부터 2,880여 년 전의 유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자세히 관찰해 보니 서주의 ‘周’는 곧 나라 국(國)자의 고자(古字)인 국( )자의 가운데 획이 침식되어 ‘周’처럼 보이는 것이고, 회년의 ‘會’자는 ‘曾’자로서 ‘증(增)’의 뜻을 가진 글자이고, 진자의 ‘眞’은 경(竟) 자로서 이 역시 경(鏡)자를 옛사람들이 편(偏)과 방(傍)에 구애하지 않고 통용한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글자의 순서를 놓고 보면 글 뜻도 분명하지 않고 글의 시작도 분명하지 않다. 게다가 이 글씨체는 예서체로 되어 있는데, 이 예서체는 진시황 때 이사(李斯)가 만들었고 한(漢)의 초기에 비로소 행해졌으니 분명히 서주 시대의 물건은 아니다. 동사(東史)에 이르기를, “동명왕이 성천에서 도읍을 정하고 그 손자 동천왕이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고 하니, 이 때는 바로 한 원제(元帝) 말년이며 예서를 옛글자로 써서 ‘국’, ‘증’, ‘경’자가 <한서(漢書)>에 실리고 쓰이던 때이다. 이것으로 볼 때에 이 거울의 명문은 한나라 시대의 글씨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동명왕이니 동천왕이니 하는 분들은 모두 천손(天孫)들로서 평양에서 지금 동왕방(東王坊)이라고 일컫는 곳은 옛날 궁궐의 터인데, 이 거울이 발굴된 곳이 그 궁궐 터로부터 200보쯤의 거리라고 하니 이것은 동명왕의 유물임이 틀림없다. 원형의 글자가 비록 앞뒤를 헤아릴 수는 없으나 자세히 보면 ‘오양음’의 ‘吾’자 앞에 점이 하나 있는 것 같으니 이 ‘오’자를 시작으로 읽어 보면 곧 ‘오양음경 자유도동왕공 서국 증년익수 민의손자(吾陽陰鏡自有道東王公西國增年益壽民宜孫子)’이니, 그러면 뜻도 조금 통한다. 그리고 연대도 그럴 듯하다. 여기에 ‘동왕공’은 ‘동명왕’을 지칭하고, ‘서국’은 비류 성천강을 의미한다. ‘유도’라고 한 것은 <주서(周書)>에 나오는 ‘유도증손(有道曾孫)’의 뜻이고, ‘증년익수’는 임금에 대한 축수(祝壽)이며, ‘민의손자’는 백성의 영원함을 빈 것이니, 대체로 이 물건이 비록 기자 시대의 물건은 아니더라도 동명왕 때의 물건임은 틀림이 없겠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거의 2,000년 전의 거이니 참으로 오래되고 오래된 것이구나. 동명왕의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당시의 유물은 아직까지 인간 세상에 남아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이정구 <평양에서 발굴한 옛 거울을 보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