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엄마는 영재센터 학부모 워크샾에 가고 승민는 연세대에 강의를 받으러 갔다. 나와 하늘이는 집에서 각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좀 무료했다. 하늘이가 있는 방을 보니 뭔가를 하고 있다. 그것이 전혀 심심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난 하늘이에게 좀 색다른 즐거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늘이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하늘아, 우리 공연 보러 갈까?"
"공연? 무슨 공연?"
"글쎄 생각해 보지 않았어. 뮤지컬 어때?"
영화는 관람의 편리함으로 인해 하늘이와 여러 번 같이 봤다. 그러나 오늘은 불편해지고 싶다. 좀 불편한 일이지만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다.
하늘이도 그게 싫지는 않은가 보다. 예전 같았으면 영화 보자고 얘기했을 텐데 내게로 와서 같이 공연 정보를 검색했다.
우리는 정하지 못했다. 시간의 여유를 갖고 있으면 괜찮았을 텐데 내 경험상 3시 또는 4시 꺼를 봐야 했으므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는 공연 정보를 알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더욱이 그것들의 대부분은 홍보성 정보들이었다. 인터넷 정보는 편리할지는 모르지만 나만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과감히 불편함을 갖기로 했다.
"가서 이리저리 돌아다 보면 보고 싶은 게 있지 않겠어?"
"그래, 그러자!"
하늘이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학로까지 가는 길은 불편했다. 전철을 갈아타야 하고 시간도 걸렸다. 혜화역에 도착하자 역시 불편했다. 사람들도 많았고 어디서 공연 정보를 얻을 것인지도 난감했다. 또한 막상 공연 정보를 찾았어도 어떤 것을 봐야 할지 몰라 불편했다. 그런데 하늘이와 난 그 불편함이 재미있었다.
우선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딪치면서도 우리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보며 그들의 사연을 상상해 보았다. 젊은 애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년의 남녀도 있었고 나이 지긋한 노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는 즐거운 사연도 슬픈 사연도 묻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옷차림은 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는 반팔까지 입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하늘아, 정말 봄인갑다."
"그러게 말이야."
하늘이와 난 죽이 맞아 이렇게 키득키득거렸다.
공연 정보가 있는 부스에 갔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나라에도 공연은 참 많았다. 부스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 리플릿을 보면서 하늘이와 난 무엇을 봐야 할지 난감함을 즐겼다. 그러다가 하늘이가 '넌센스'를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난 괜찮았다. 왜냐하면 그 뮤지컬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공연되던 것이어서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다시 걷는 불편함을 즐겼다. 공연장을 찾아 좌석을 예매해야 했다. 집에서 편하게 인터넷을 통해 예매하는 편리함으로 인해 시간을 절약하고 육체적 낭비를 줄였던 터라 그것은 불편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그 불편함을 갖지 않았으면 <창조콘서트홀>을 찾아가면서 여기저기 붙어 있는 가지각색의 간판을 어찌 감상할 수 있었겠는가?
좌석 배정을 받고 나니 또다시 불편함이 찾아 왔다. 약 50분 가량을 어디에선가 보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또 걷기로 했다. 그냥 걷기로 했다. 하늘이와 난 이 골목 저 골목을 걸으며 이것저것 보면서 얘기를 나눴다.
"야, 이 오토바이 멋있다. 아빠도 이런 거 하나 사서 엄마를 태우고 다닐까?"
"아빠, 저 나무 봐. 꽃 대신에 리본을 달았어. 이쁘다."
이런 얘기도 나눴고 하늘이의 학교 친구 얘기도 나눴다. 때로는 말없이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것으로 우리의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불편함도 즐겼다. 아까는 보지 못 했던 것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나온 김에 대학로의 모든 골목을 보고 가는 효율성을 생각하면 아까 지나오지 않은 저쪽 골목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보기보다는 아까 봤던 것의 새로운 면을 보는 것도 괜찮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불편함은 골목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하기에 전혀 따분하지 않았다.
'넌센스'는 다섯 명의 수녀들이 관객을 웃고 울게 하는 코메디였다. 자신들이 수녀가 된 사연을 말하면서 아픔과 소망을 고백하는 얘기였다. 그 고백은 춤과 노래,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함께 버무려져 우리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하늘이는 때로는 웃고, 때로는 박수를 치며 뮤지컬을 즐겼다.
공연이 끝난 뒤 우리는 나오면서 다음에 또 오기로 했다.
우리는 승민이를 부르고 엄마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맛있는 것을 찾아 이리저리 또 헤맸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오랜 만에 같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다.
불편함이 주는 즐거움.
가족들과의 대화, 사람들의 사는 모습,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느끼는 삶. 이 모든 것들이 불편함 속에서 얻었던 소중한 즐거움이었다.
"하늘아, 우리 공연 보러 갈까?"
"공연? 무슨 공연?"
"글쎄 생각해 보지 않았어. 뮤지컬 어때?"
영화는 관람의 편리함으로 인해 하늘이와 여러 번 같이 봤다. 그러나 오늘은 불편해지고 싶다. 좀 불편한 일이지만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다.
하늘이도 그게 싫지는 않은가 보다. 예전 같았으면 영화 보자고 얘기했을 텐데 내게로 와서 같이 공연 정보를 검색했다.
우리는 정하지 못했다. 시간의 여유를 갖고 있으면 괜찮았을 텐데 내 경험상 3시 또는 4시 꺼를 봐야 했으므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는 공연 정보를 알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더욱이 그것들의 대부분은 홍보성 정보들이었다. 인터넷 정보는 편리할지는 모르지만 나만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과감히 불편함을 갖기로 했다.
"가서 이리저리 돌아다 보면 보고 싶은 게 있지 않겠어?"
"그래, 그러자!"
하늘이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학로까지 가는 길은 불편했다. 전철을 갈아타야 하고 시간도 걸렸다. 혜화역에 도착하자 역시 불편했다. 사람들도 많았고 어디서 공연 정보를 얻을 것인지도 난감했다. 또한 막상 공연 정보를 찾았어도 어떤 것을 봐야 할지 몰라 불편했다. 그런데 하늘이와 난 그 불편함이 재미있었다.
우선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딪치면서도 우리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보며 그들의 사연을 상상해 보았다. 젊은 애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년의 남녀도 있었고 나이 지긋한 노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는 즐거운 사연도 슬픈 사연도 묻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옷차림은 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는 반팔까지 입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하늘아, 정말 봄인갑다."
"그러게 말이야."
하늘이와 난 죽이 맞아 이렇게 키득키득거렸다.
공연 정보가 있는 부스에 갔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나라에도 공연은 참 많았다. 부스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 리플릿을 보면서 하늘이와 난 무엇을 봐야 할지 난감함을 즐겼다. 그러다가 하늘이가 '넌센스'를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난 괜찮았다. 왜냐하면 그 뮤지컬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공연되던 것이어서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다시 걷는 불편함을 즐겼다. 공연장을 찾아 좌석을 예매해야 했다. 집에서 편하게 인터넷을 통해 예매하는 편리함으로 인해 시간을 절약하고 육체적 낭비를 줄였던 터라 그것은 불편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그 불편함을 갖지 않았으면 <창조콘서트홀>을 찾아가면서 여기저기 붙어 있는 가지각색의 간판을 어찌 감상할 수 있었겠는가?
좌석 배정을 받고 나니 또다시 불편함이 찾아 왔다. 약 50분 가량을 어디에선가 보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또 걷기로 했다. 그냥 걷기로 했다. 하늘이와 난 이 골목 저 골목을 걸으며 이것저것 보면서 얘기를 나눴다.
"야, 이 오토바이 멋있다. 아빠도 이런 거 하나 사서 엄마를 태우고 다닐까?"
"아빠, 저 나무 봐. 꽃 대신에 리본을 달았어. 이쁘다."
이런 얘기도 나눴고 하늘이의 학교 친구 얘기도 나눴다. 때로는 말없이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것으로 우리의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불편함도 즐겼다. 아까는 보지 못 했던 것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나온 김에 대학로의 모든 골목을 보고 가는 효율성을 생각하면 아까 지나오지 않은 저쪽 골목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보기보다는 아까 봤던 것의 새로운 면을 보는 것도 괜찮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불편함은 골목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하기에 전혀 따분하지 않았다.
'넌센스'는 다섯 명의 수녀들이 관객을 웃고 울게 하는 코메디였다. 자신들이 수녀가 된 사연을 말하면서 아픔과 소망을 고백하는 얘기였다. 그 고백은 춤과 노래,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함께 버무려져 우리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하늘이는 때로는 웃고, 때로는 박수를 치며 뮤지컬을 즐겼다.
공연이 끝난 뒤 우리는 나오면서 다음에 또 오기로 했다.
우리는 승민이를 부르고 엄마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맛있는 것을 찾아 이리저리 또 헤맸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오랜 만에 같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다.
불편함이 주는 즐거움.
가족들과의 대화, 사람들의 사는 모습,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느끼는 삶. 이 모든 것들이 불편함 속에서 얻었던 소중한 즐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