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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을 개인에게만 내맡기지 않고 국가가 직접 관리 혹은 승인하려던 시도는 역사상 전제적 왕조국가들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역사기록의 통제는 동시대와 후세에 대해 통치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불가결의 수단이라는 인식에서였다. 그런 경향은 동양에서 두드러졌다. 중국의 경우에는, 명대(明代)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의 역사가 ‘바른 역사’라고 공인된 것, 즉 정사(正史)로 불리는 20여개의 왕조별 역사서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사사로운 동기와 관심에서 쓰인 역사서들은 야사(野史) 혹은 잡사(雜史)로 분류되었다. 중국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도 전통 시대에는 당연히 ‘정사’와 ‘야사’의 이분법적 역사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반면에 서양에서 역사라는 장르의 발생지가 그리스 세계였다는 점은 훗날 역사기록에 있어 서구인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헤로도토스가 그 창시자였다고 알려진 ‘역사(historia)’란 애당초 신화의 미혹과 권위의 중압을 거부하는 진실 탐구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그리스 도시국가처럼 개인의 자유로운 정신의 발현을 보장하는 사회조건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서양에서는 ‘역사’의 이런 발생배경 때문인지, 후대에도 국가가 고용한 사관(史官)같은 집단이 ‘역사’를 기록한다는 발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정사’와 ‘야사’의 구분도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전제왕권이 지배한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통치권에 비판적인 역사책을 탄압한 적은 있었어도, 국가 스스로 ‘정사’를 확립하는 제도를 도입한 적은 없었다.
서양에서 조직적으로 ‘정사’를 확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대개 종교조직, 즉 교회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그 한 예는 로마 공화정 초에 제사장이 대대로 기록했던 ‘제사장 연대기’이다. 이 기록은 기원전 4세기 초 갈리아인이 잠시 로마시를 침공했을 때 전소된 뒤, 사실상 단절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후 국가 차원에서 그 기록상실을 복구하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던 반면, ‘연대기’라는 이름으로 과거사의 복원에 덧붙여 당대사를 기록하려고 시도한 것은 한결같이 개인들이었다. 훗날 로마 황제들의 역사를 냉정한 필치로 그려 연대기란 서술형식을 서양사학사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만든 것도 개인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였다. 그 후 주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역사를 활용하려 한 예가 있기는 있었다. 가령 고대 로마로 소급되는 영광스런 과거사를 복원하려던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도시들의 시도, 혹은 기원전 3세기 이집트를 장악한 후 고대 파라오 왕조들과의 연계를 주장하려 했던 마케도니아 출신 톨레마이오스(Ptolemaios)왕조의 시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 때조차 역사의 재구성을 담당한 것은 사관(史官)들이 아니라 개인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거역할 수 없는 인류사의 대세로 굳어진 현대에 들어와서도 국가에 의한 역사 통제의 예는 없지 않다. 지금은 거의 해체된 사회주의 진영에 속했던 국가들에서의 역사기록이 그랬다. 무엇보다 일국의 공산당사 같은 것은 말하자면 중국에서의 ‘정사’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전제주의나 전체주의는 개인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체제에 대해 경쟁력이 없음이 지금까지의 인류사에서 확인되는 교훈이라면, 그것은 역사서술에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정사’와 ‘야사’를 구분했던 동양은, 서양의 ‘역사’에 대한 정신과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김경현 <서양 역사, 자유로운 개인 정신의 산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