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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멈포드는 예술을 정의하면서 기술의 충족은 일차적인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고대로부터 예술(arts)이라는 말속에 기술(technic)의 의미가 담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술은 장인에 의한 기술적인 작업들이었으며, 어느 분야의 예술보다 특히 미술은 시각과 조형의 효과를 항상 생각하기 때문에 기술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그렇다고 미술이 기술의 눈치만을 본 것은 아니다. 미술은 기술과 불안한 동거를 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미술은 기술에 종속되기도 하고 탈피하기도 했다.
미술이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나 미적 관념을 추상적 표현으로 나타내려 하였던 20세기 초 미술가들은 장인적인 기술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의지가 강하였다. 인간의 내적인 세계를 시각화하려 했던 조형예술가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꿈꾸며 조형의 기본 요소인 점, 선, 면, 색채의 본질 추구와 정신성의 탐구를 실천했다. 이들은 더 기술과 멀어져야만 순수한 미술이라 생각했다. 이 같은 생각의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과학기술이었다. 즉 19세기 중반 사진기의 발명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나야만 그들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술은 다시 과학기술에 동거를 요청한다. 과학기술을 직접적으로 응용하고 도입하여 움직임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입체 조형 작업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것들은 회화나 조각의 장르를 떠나 새로운 공간속에 다양한 재료의 실험으로 조형화한 시각 미술을 탄생시킨다. 연대적으로 보면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는 1955∼1970년 사이가 되며 이러한 경향의 미술을 총칭하여 키네틱미술(Kineticart)라고 한다. 키네틱미술은 움직임을 중시하거나 그것을 주요소로 하는 예술 작품을 말한다. 키네틱 미술가들은 과학기술에 손을 내밀면서 열렬한 구혼자가 되었다.
이미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헨리 콜을 비롯하여 폴 수리오 등의 미학자들은 새로운 미가 기계로부터 태어나고 기계 덕택으로 그 같은 새로운 미의 작업이 대중 속으로 확산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견하였다. 그들은 예술이 과학적인 유희를 뛰어넘어 현실적이고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게 하며, 마치 과거에 예술이 마술이나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만들어지듯이, 오늘날에는 그 대용으로 과학이 예술과 결합하는 것으로 보았다. 구체적으로 예술가들은 손을 사용하는 단순 기술자나 요술가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을 이용하는 "테크놀로지 예술"을 실험실에서 창조해 내었다. 이리하여 미술 역시 시대성의 발로로 진보적 성격을 갖게 되며, 그림이란 그려야만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날 조형예술과 과학기술의 밀월 관계는 새로운 환경 예술을 낳았다. 환경 예술품들은 개인주의 성격에서 벗어나 집합적이며 공공의 합리적인 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흔 히 예술가와 과학기술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며 주위 환경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감상적인 미술이나 장식에서 벗어나 대중이 모이는 공공 장소나 거리, 건물 등에 설치되어 우리 생활에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그럼으로써 일정 기간의 제약된 작품인 것으로만 여겨졌단 조형미술품들이 영구성을 가진 작품들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보다 더 놀라운 첨단 기술을 이용하며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놓고 보면 필연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재길 <현대 조형 예술과 과학기술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