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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본질적 특성이 일반적으로 사진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있다는 사질주의적 견해는 영화의 탄생 이래로 오랜 시간동안 영화이론의 적자로서 인정받아 왔다. 반면 비현실적인 것을 시각화할 수 있는 영화의 환상성은 주로 본질이 아닌 형식적 관점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것으로 치부되었고, 환상성을 중시한 형식주의 영화 이론은 영화의 족보에는 이름이 올라가 있었지만 서출의 서러움과 비난을 받아왔다.
㈏촬영자의 개입 없이 카메라 앞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든, 촬영자의 개입에 의해서 연출되고 선택된 것이든, 또는 멜리에스의 경우처럼 광학적 속임수나 미니어처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든, 심지어는 애니메이션의 경우든 지금까지 모든 영화는 카메라 앞에 존재하는 실제 대상을 전제로 했다. 이는 수많은 이론가들의 영화 및 영상에 관한 이론의 대전제였고 동시에 근원적으로 영화적 표현의 한계와 제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카메라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의 형상을 필름에 담을 수는 없는 것이고,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도 많은 노력과 경제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현실 재현이 영화에서 핵심적인 것으로 여겼져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최근 뤼미에르의 <기차의 도착>이란 영화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영화는 기차역으로 기차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 관람한 관객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차를 보고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 영화는 오랫동안 사실주의와 다큐멘터리의 시발점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뤼미에르의 영화들 역시 현실의 일부를 그냥 카메라에 담은 것이 아니라, 일관된 구상에 바탕을 두어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이 많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이다. 기차가 역에 접근할 때의 대각선 구도는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움직임의 역동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고, 기차를 오르내리는 수많은 사람들은 우연히 기차에 탔다가 카메라에 포착된 여행객들이 아니라 모두 뤼미에르가 아는 사람들로 촬영을 위해서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에서의 현실 재현이 곧 사실의 재현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이 영화에서 관객들을 놀라게끔 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영화의 본질이 과연 현실의 재현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진정한 힘은 관객들이 영화 속 기차를 현실에서 보았던 기차의 완벽한 재현으로 인지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아마도 관객들의 감탄과 탄성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관객들이 감탄과 탄성을 넘어서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자리를 뛰쳐나간 것은 영화가 관객들을 뭔가 착각에 빠뜨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으로 볼 때 영화의 진정한 힘은 오히려 현실의 재현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 즉 착시와 환상의 세계로 관객들을 이끄는 데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일부 공상 영화 뿐 아니라 영화 전반의 기초적인 기술로서 자리를 잡고 있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무엇이 현실의 재현이고 무엇이 조작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영화의 본질에 대한 기존의 탐색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고 새로운 차원에서의 이론화를 요구하고 있다. 뤼미에르의 <기차의 도착>에 대한 새로운 평가까지 나오는 지금, 영화는 탁월한 현실 재현능력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고 환상의 세계로 진입하도록 해주는 예술장르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남완석 <영화와 환상성:중세적 모티브의 영화적 변용에 대한 고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