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ARI의 희로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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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다'는 부사 '속삭속삭'의 '속삭'에 접미사 ‘-이다’가 붙어 동사로 전성된 말이다. 여기에 쓰인 ‘속삭속삭’은 남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꾸 가만가만 말하는 소리 또는 그 모양을 나타낸 의성어이다. 이에 따라 ‘속삭이다’의 의미도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속삭이다’는 말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느끼게 한다.

‘속삭이다’는 정다움의 언어다. 우리는 희망을, 행복을, 사랑을, 심지어 가슴 아린 사연을 '속삭인다'. 정답지 않은 사람에게 슬픈 얘기를 낮은 목소리로 털어놓을 리는 없다. ‘속삭이다’ 또 비밀의 언어다. 사실 이 비밀은 흔히 정다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 ‘비밀-정다움’을 신뢰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았으면 하는 얘기를, 정답고 미더운 상대만 들었으면 하는 얘기를 우리는 ‘속삭인다’.

내가 어렸을 때 '깜보'라는 은어가 있었다. 한 아이와 깜보를 맺은 아이가 또 다른 아이와 깜보를 맺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은 깜보는 '의리의 헤픔'을 드러냈다. 가장 이상적인 깜보는 단둘만이 맺는 것이었다. 깜보끼리는 군음식을, 딱지를, 때로는 체벌까지도 나눠야 한다. 또한 깜보 사이엔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깜보에 가장 가까운 표준어로 '단짝'이나 '짝패'라는 말이 떠오르긴 하지만, 이 깔끔한 표준어들은 '깜보'라는 말을 휘감고 있는 '막무가내의 의리와 헌신'의 분위기를 넉넉히 드러내지 못한다. ‘속삭이다’의 주체와 대상이 바로 이 깜보가 아닐까 한다. 깜보끼리 주고받는 말이 바로 속삭임인 것이다.

'속삭이다'의 자매어라고 할 만한 낱말이 한국어에는 지천인데, 그 대부분은 뭔가 부정적인 함축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를테면 의성어 '속닥속닥'에서 나온 '속닥이다'와 '속닥거리다', 그 말들의 큰말인 '숙덕이다'와 '숙덕거리다', 이 말들의 센말인 '쏙닥이다' '쏙닥거리다' '쑥덕이다' '쑥덕거리다'는 깜보의 언어이긴 하지만, 그리 아름답지도 정의롭지도 않아 보인다. 의성어 '속달속달', ‘속살속살’, '소곤소곤' 등에서 퍼져 나간 말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 말들에선 뭔가 떳떳치 못한 목적으로 누군가를 해코지하려는 음모의 기미가 느껴진다. 미적 윤리적 거리낌이 느껴지고 어딘지 추악(醜惡)의 느낌이 배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떳떳이 사랑을, 희망을, 행복을 ‘속삭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숙덜대’거나 ‘숙덕거리’거나 ‘수군거릴’ 땐 뭔가 개운치 않을 것이다. 속삭임은 미적 윤리적 거리낌 없이 입 밖에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타적 언어다. 그것은 수많은 '깜보 언어' 가운데 가장 순결하고 낭만적인 말이다. 그래서 그 많은 자매어들 가운데 오로지 속삭임만이 거의 유일하게 사랑의 언어가 될 수 있다.

-고종석 <속삭임-아리따운 은밀함>
Posted by pop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