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ARI의 희로애락

"와~!"
하는 함성 소리 속에서도 핸드폰 벨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인선이 형의 전화다. 송년회 자리에 와 계신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서는 안 되는 자리였으나 내 마음은 그라미를 향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선생님에게 토요일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난 차에 몸을 실었다.

전철 속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출판사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출판사 직원이 무슨 죄냐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선생님, 원고요~!"
역시 독촉 전화다. 원고 넘겨주기로 한 날짜가 이미 많이 지났다. 그러나 어쩌랴, 문제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을.
사실 요즘 심신이 복잡하다. 감기 기운과 함께 등에 담이 결려 몸이 안 좋다. 일곱 명의 동료가 파면과 해직이라는 부당 징계를 받았다. 몸이 안 좋은데도 오늘 교육청 앞 집회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외롭지 않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옆에 있어야 했다.
학교 일도 그렇다. 2010년 학교 선택제를 앞두고 교장이 학교 홍보 팜플렛을 만들라는 특명을 내렸다. 한 달 동안 이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얼마 전에는 업체에서 시안이라고 갖고 온 것을 엎어 버렸다. 내 의도를 전혀 살리지 못한 것이었다. 더욱이 난 애초에 학교 선택제에 반대한다. 제도 도입을 막으려고 싸우고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막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우리 학교를 알려야 한다. 이중으로 날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난 원고 독촉을 받으면 아예 손을 놔 버리는 나쁜 성미를 갖고 있다. 익어야 밥맛이 좋은 것처럼, 고민해야 좋은 문제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옆에서 독촉하면 짜증이 난다. 이 새내기 출판사 직원은 나를 잘 몰라서 그런지 독촉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짜증이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지금 그라미들을 만나러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리라.'
하고 있을 때 내 마음은 어느덧 사당역에 도착했다.

음식점 안에 들어 오니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동준이 형이 오셨다. 그 멀리 천안에서 멀다하지 않고 오셨다. 기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하니 새삼 문명의 이기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면 한 시간 반도 긴 시간이 아니던가? 먼 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꼭 찾아주는 동준이 형의 마음이 참 따스하게 전해져 온다.
'어! 이 미인은 누구?'
속으로 생각하며 한 여인에게 인사를 했다. 1기 숙연이 누나란다. 전에도 오셨다는데 난 핸드폰 번호만 알고 있고 처음 뵙는다. 잘 모르는 후배의 문자 메시지에 이렇게 찾아주는 것으로 화답해 주시니 참 고마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나와 난 얘기 한 번 제대로 못 나눴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뵈면 재밌는 얘기 좀 나누리라.
정란 누나가 멀리 호주에서 왔다. 1월 중순까지 한국에 계신다고 한다. 난 정란 누나가 사회복지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이런 거 보면 난 참 무심한 후배라는 생각이 든다.
잠깐이었지만 사회 복지에 대해 재밌게 얘기를 나눴다. 서울 부촌의 하나인 목동과 빈촌의 하나인 신림동을 왔다갔다 하면서 난 사회 복지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목동에 있는 학교가 우리 학교보다 성적이 좋은 이유는 학교가 좋아서가 아니라 부모가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의 20%가 국가로부터 학비 지원을 받지 못하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것이 우리 학교가 속한 신림동의 현실인 것이다. 그런 현실이 날 사회 복지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경쟁이 자꾸만 무서워진다. 지금까지 출판사에서 문제 출제 의뢰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 나에게도 아직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뭔가 의지할 것을 찾게 되었다. 미래를 위한 연금이나 건강 보험 같은 것이 이제는 자꾸 신경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쟁이라는 화려한 수식으로 사회 복지 비용을 내지 않으려는 신자유주의의 술책 속에서는 경쟁력을 갖고 있는 사람조차도 불안하지 않은가? 끊임없는 사회 복지의 확대야 말로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름길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우리의 핸섬보이 경덕이 형이 오셨다. 전에도 참 멋이 있는 분이다 생각해 왔지만, 나이와 함께 오는 중후함이 더해지니 또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사롭게는 용산고 후배라 난 깍듯이 있어야 했다. 호프집에서의 2차 비용을 치르시는 후배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흥기 형도 오셨다. 늦게까지 일처리로 바빴단다. 인사담담을 맡게 되었는데 사원들 근무 평가 때문에 요즘 정신 없다 하신다. 범진이 형도 일처리 때문에 좀 늦으셨다. 인사동에 세무사무실을 여시고 분주한가 보다. 종경이가 책을 내놓는다. 펜클럽에서 수필을 발표했나 보다. 나중에 읽어 보리라.
그 외 연옥이, 정숙이, 순화, 남희, 정배, 용성이가 왔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후배들과는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꼭 선배들을 챙기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난 그라미에 가면 선배보다 후배로 있고 싶다. 누나와 형들 앞에서 마음 편하게 후배로 있고 싶은 것이다. 이 역시 나이 40을 넘기면서 갖게 된 마음이다. 아마도 후배 그라미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난 이기적이게도 선배 노릇을 하지 않고 후배 노릇을 하고 있다. 후배들아 미안하다. 다음에 따로 한 번 보자. 그때는 내가 선배 노릇을 할 테니.
서병이 형과 태환이 형은 오고 싶은데 오지 못해 아쉽다는 문자 메시지를 일찍이 전해 오셨다. 휘우 형은 광주에서 올라오는 대로 오시겠다고 했으나 일정이 늦어져 못 오신단다. 선혜 누나는 오시고 싶은데 사무실에서 일이 늦게 끝나 못 오신다고 전화를 주셨다. 참 보고 싶은 얼굴들인데 아쉽다.
노래방까지 가서 노래들을 부르고 우리는 헤어졌다. 인선이 형과 범진이 형, 그리고 나는 같이 택시에 올랐다. 영권이 형에게 가기 위한 것이다. 학원 때문에 못 오신다고 했기에 우리가 가기로 한 것이다. 조금 더 넓어진 이마와 함께 더욱더 동그란 얼굴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전에 약속했던 삼합에 막걸리를 사셨다. 자랑하신 대로 맛이 좋았다. 우리는 막걸리 같은 얘기를 서로 나누며 오랜 만에 회포를 풀었다.

지금 난 글쓰기를 잠시 멈추고 아내에게 카페라떼를 만들어 주었다. 몇 개월 전 에스프레소 포트와 커피분쇄기, 거품기 등을 샀다. 진한 원두 향기와 기름진 커피맛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즘 난 내가 만든 카페라떼를 아내가 맛있게 마시는 모습을 즐기며 저녁에 여유를 가지는 재미에 폭  빠져 있다. 부드러운 하얀 거품 뒤로 전해 오는 달콤한 커피와 향기가 그만이다. 그 후로 난 인스턴트 커피를 입에 대지 못한다. 그것은 자극적이기만 하지 감동을 전혀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득 그라미가 카페라떼라는 생각이 든다. 그라미들과 만나면 하얀 거품과 같이 부드럽고 커피 향기와 같이 달콤한 얘기들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자극만 주고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인스턴트 만남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 속에서 그라미와 같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난 참 행복한 놈이다.

내년에 난 좀 거칠게 살아야 한다. 전교조 지역 사무장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기저기 집회다 뭐다 해서 떠돌아 다녀야 할 것이다. 사실 벌써부터 긴장된다. 이명박 정권과의 싸움이 이제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파면과 해직의 칼까지 휘두르는 걸 보면 만만한 싸움이 아닐 성 싶다. 그러나 난 행복하게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일을 잊고 그라미에서 따뜻한 사람들과 카페라떼와 같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2008년 연말도 그라미와 이렇게 따스하게 보낸다.
Posted by pop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