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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 회담 직후에 한 신문은 대통령 부인을 가리켜 ‘OOO 여사’라고 하지 않고 ‘OOO 씨’라고 했다가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곤욕을 치렀다. 창간 이래 계속 대통령 부인에게 ‘여사’란 호칭을 붙이지 않고 써 왔던 이 신문사에게는 ‘OOO씨’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지만 일부 독자들에겐 어색하게 전해진 모양이다. 그 신문은 칼럼을 통해 친절한 답변을 내놓았다. ‘씨’라는 말은 권위주의적인 색채를 지우려는 뜻이었고,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관례를 지양하려는 의미도 있다고 했다.
이전 신문들에서 대통령 부인에 대한 호칭은 ‘영부인 ○○○ 여사’이거나, 지금도 쓰이는 ‘대통령 부인 ○○○ 여사’였다. 그러다 보니 일부 독자들은 ‘영부인’은 대통령의 부인에게만 붙일 수 있는 표현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어떤 사람들은 ‘영부인(令夫人)’이 ‘대통령(大統領)’의 ‘령’에서 온 것처럼 받아들였다. 이와 함께 ‘영부인’이 본래 가지고 있는 ‘남의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이라는 의미는 퇴색해 갔다. 물론 지금은 ‘영부인’이라는 말이 권위적이어서 대부분 신문에서 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독자들이 ‘영부인’이라는 말을 대통령 부인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여사’는 존칭어이다. 때때로 친근한 사람들 사이에 장난으로 쓰기도 하지만, 보통은 결혼한 여성이나 사회적으로 저명한 여성을 높여 이를 때 사용한다. 그런데 신문에서는 주로 남편의 사회적 지위를 봐 가며 특정 여성에게 이 말을 붙여 왔다. 그러다 보니 독자들은 당연히 그 말에 권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씨’는 어떤가? ‘씨’가 쓰이는 상황은 다양하다. 그만큼 뜻도 여러 곳에서 달리 쓰인다. ‘씨’는 격식을 갖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친근감을 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씨’는 그 어떤 호칭보다 가치중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문에서도 가치중립적이면서도 격식을 갖춘다는 의미에서 ‘씨’를 많이 쓴다. 그런데 신문은 대체로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 경제인 등 특정인들에게 ‘씨’를 붙이는 것을 주저했다. 더욱이 신문은 그 특정인들이 부도덕한 행위를 했을 때 가끔 ‘○○○ 씨’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독자들은 특정인에게 ‘씨’라는 호칭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틀에 갇힌다. 심지어는 그럴 만한 자리가 아닌데도 현직에 있지 않은 사람을 부를 때 ‘씨’를 붙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OOO 전 의원’, ‘OOO 전 회장’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 머리를 갸우뚱한다.
이렇게 보면 대통령 부인을 ‘OOO씨’라고 불렀다며 항의하는 독자들을 뭘 잘 모르는 사람이고 매도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신문은 불특정한 다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신문 언어는 여러 계층의 언어가 고루 반영돼 보편성을 갖춰야 하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부르고 가리켜야 한다. 신문은 나이도, 성도, 계급도 없기 때문이다.
-이경우 <신문 언어의 민주주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