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ARI의 희로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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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민이가 돌아왔다.
전화 상으로 들려 오는 그의 목소리는 옛날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사진작가!
회사원으로 있다가 아버님의 사업을 배운다는 얘기까지 들었었는데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은 뜻밖이었다. 아니 놀라웠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결혼도 하고 했으니 평범하게 회사원 또는 사업가로 정착할 법도 한데 또다시 길을 떠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를 다니고 이제는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나는 찬민의 변한 모습을 보고 싶어 인사동 <갤러리 룩스>로 향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던 터라 인사동 거리는 흑백사진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오랜 만에 걸어 보는 길이다. 고등학교 때는 근처 독서 써클에서 토론을 마치고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대학교 때는 지금의 아내와 데이트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옛 모습은 사라져 없어진 듯 했지만 드문드문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가게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찬민이의 개인전을 찾아가면서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Intimate City"
그의 개인전 테마이다. 난 영어 사전을 뒤적여서야 이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강한 의문이 나를 엄습했다.
'도시'
우리 사람들 중에 도시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시와 소설 속에서 도시는 삭막하고 차가우며 메마른 곳이다. 그와 반대로 시골은 아늑하고 따뜻하며 인정이 넘치는 곳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관념은 오늘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면서도 마음은 시골에 둔다. 그렇기에 도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이다.
그런데 찬민의 개인전 테마로 얼굴을 내민 도시는 'Intimate'란다. 뭘로 번역해야 할까? '친근한'? 이건 내 머릿속의 도시와는 너무나 달라 싫다. '익숙한'? 이건 좀 그래도 낫다. 그러나 이 역시 도시를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 중에 하나인 나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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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문을 지우지 못한 채 나는 어느 새 갤러리의 문을 열고 있었다. 찬민이는 없었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속으로 없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후배로서의 얼굴이야 아무 때나 볼 수 있지만 사진 작가로서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 이번 만큼은 찬민이를 사진작가로서 만나고 싶었다. 나는 찬민이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박찬민 개인전을 보러 온 것이다. 그렇기에 그 없이 사진을 보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찬민이의 사진 속 도시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빌딩과 아파트, 그리고 대로와 자동차가 전부였다. 사람이 있는 작품은 딱 한 컷이었다. 주택가 옆에 공동묘지가 있는 작품이었는데 그 사람조차도 아주 자그마하게 보였다. 찬민이에게 사람은 도시에서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대신 사람들이 만든 빌딩과 아파트를 통해 도시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사진들은 어김없이 산이 배경이 되고 있었다. 아파트와 빌딩은 산 사이 사이, 아니면 산보다 앞에 있었다. 산은 그것들보다 전면에 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도시에서 자연은 조연이지 주연은 아니지 않은가?
흥미로운 것은 산은 뒷쪽으로 겹겹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빌딩과 아파트는 맨 앞에서 진하면서도 선명하게 보이고, 산은 그 뒤로 물러나면서 점점 흐릿해지다가 나중에는 하늘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다 보니 사진은 대부분 위아래로 이등분 되었다. 아랫 부분은 도시의 빌딩숲들이 진하게, 위 부분은 산과 하늘이 흐릿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찬민이는 이런 구도를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저 너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저 너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인가? 이 때 또 다시 내 머릿속에는 개인전의 테마가 떠올랐다.
 'Intimate City'
그랬구나. 빌딩과 아파트의 숲이 산보다 더 선명했던 이유는 그랬구나. 그에게 있어 산너머는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도시 속의 한 부분으로서 빌딩과 아파트와 어울리는 존재인 것이다. 도리어 산보다는 빌딩과 아파트가 또 하나의 숲을 이루고 가깝게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문득 난 찬민이가 도시에 많은 애착을 갖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그에게 도시는 왜 친근하고 익숙한 것일까? 아마도 그는 시골과 호흡한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는 서울 출신이다. 그는 아파트 숲 속에서 살았다. 그의 생활은 모두 빌딩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찬민이는 언제나 즐거운 도시인의 모습이었다. 그가 입고 다니는 옷과 헤어스타일도 세련된 도시인의 그것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다시 말하면 도시는 그에게 있어 삶의 터전이자 고향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도시는 버릴려야 버릴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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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의 사진에서 인상에 남는 또 하나를 말해야겠다. 그의 몇몇 사진 속에는 넓은 도로가 중앙에, 빌딩이나 아파트와 달리 하얗게 선명한 빛으로 드러난다. 도시는 수많은 골목길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골목길은 보이지 않고 대로 하나가 부각된다. 이 역시 도시를 도시답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매일 그 속을 수없이 돌아다닌다. 그 도로는 빌딩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대신하는 아이콘이다. 그 도로가 없었다면 어찌 도시가 동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비쳐지겠는가? 아파트와 빌딩이 도시의 정적인 모습이라면, 대로는 도시의 동적인 그것이리라.
솔직히 난 찬민이의 사진 속에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내가 갖고 있는 도시의 우울한 모습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 속의 도시는 '풍경화'으로서의 도시지 '풍속화'로서의 도시는 아닌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도시의 우울한 모습은 어찌 만들어졌던가?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즉 몰인정한 경쟁, 이해타산적인 관계, 개인중심적인 퇴폐가 도시의 지울 수 없는 우울한 모습이다. 그 이미지는 풍경화로서의 도시로는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빌딩과 아파트, 도로로 치환된 그의 사진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잠시 잊게는 할 망정 없애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 찬민이를 만나면 이에 대해 얘기를 나눠 봐야겠다. 아마도 그런 얘기를 하는 우리는 또 다른 만남이 될 것이다. 문득 그런 만남이 기다려진다. 선배와 후배가 아닌 향유자와 작가와의 만남. 우리는 또다시 한 만남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갤러리를 나왔다. 조금만 걸어가면 안국역이었으나 난 종로 3가역으로 가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 도시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옛날 번화한 종로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거리는 흑백사진 톤이었다.
도시. 과연 그것은 친근한 고향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순히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어쨌든 찬민이의 도시는 나의 도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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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op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