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가 교차로 앞에 멈춰섰을 때 난 내 눈을 의심했다. 내가 잘못 보았거니 하며 눈을 씼고 다시 보았으나 분명히 허공에 그것은 떠 있었다.
"전교조에 휘둘리면 교육이 무너진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러면 내가 우리 나라 교육을 망치고 있다는 말인가? 그 순간 내 머릿속은 과거로 달리고 있었다. 마치 동네 애들한테 놀림을 받아 너무나 억울해, '엄마!'하며 울먹이는 어린 아이처럼 난 과거로 뛰쳐 들어갔다.
"내가 왜 전교조에 가입했던가?"
교사가 되기로 내가 마음 굳혔던 것은 아무래도 중학교 2학년 때인 것 같다. 그때 국어 선생님을 짝사랑하면서 나중에 국어 교사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다짐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의 관심은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어줍은 시를 끄적여 보고, 고등학교 때 <그라미>라는 독서 클럽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소설책을 읽고 토론하며 종로와 청계천 바닥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것을 유심히 보면서 난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칠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급기야 대학에 입학할 때 난 주저하지 않고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지원했다. 그것도 수험번호 1번이었다. 당시 눈치작전이 치열했던 상황에서 남들은 잘 가지 않으려는 국어교육학과였다.(당시 경제 상황이 좋아서 많은 학생들이 회사원은 되려해도 교사는 되려하지 않았다. 박봉에다 쪼잔한 생활로 인식된 것이 교사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첫번째로 접수시키자 창구에 있던 교직원 한 분이 '학생이 처음이야' 하며 반갑게 웃으면서 수험표에 스템프를 찍어주시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때 내가 교사가 될 자격이 없다는 회의에 빠져 외도하며 방황하기도 했지만, 난 어느날 무사히 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때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멋진 교사를 꿈꾸며 학생들 속에 같이 웃고 같이 우는 스승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스승의 모습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버렸던 것이다.
난 아이들을 성적으로 차별하지 않는 교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게 내려오는 것은 어느 대학을 몇 명이나 보냈느냐 하는 꼬리표였다. 아이들과 같이 울고 웃는 것은 성적이 좋았을 때나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좋은 교재를 만들어 좋은 방법으로 애들을 가르치면 되는 줄 알고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도 해 보았다.(덕분에 문제집 집필로 짭짤한 인세 수입을 얻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여전히 성적만으로 아이들을 뽑는 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옛날 선생님들이 공부 잘하는 애들에게 더 신경 쓰는 것이 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였음을 난 알게 되었다.
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갖고 칠판 앞에서 열심히 가르치다 늙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학교 사회가 관료들의 횡포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이들의 개성이나 사정은 온통 그들의 숫자놀음 앞에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학생들이 얼마나 성적 올랐느냐가 중요했지 어떻게 공부했는지는 필요 없었다. 또한 부장이나 교감, 교장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학생들과 열심히 생활하다 늙어도 '나이 먹을 때까지 뭐했냐?'는 사람들의 소리만 들렸다. 옛날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신경쓰기보다 자리에 연연하는 것이 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였음을 난 알게 되었다.
난 돈 문제와 관련하여 깨끗한 선생님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정비리는 날 너무나 곤혹스럽게 했다. 여기저기 상납이 강요되고 거부하면 잘난 척한다는 핀잔이 난무했다. 그래서 다른 학교로 도망을 해보기도 했다. 지금 근무하는 학교는 다행히 그런 것은 없었으나 다른 학교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날 우울하게 했다. 나만 마음 편하다고 해서 사회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옛날 선생님들이 촌지다 뭐다 해서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이 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였음을 난 알게 되었다.
난 가난하여도 스승으로서의 보람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승민이와 하늘이가 태어나면서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그나마 품위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날 우울하게 하였다. 지금은 경제 사정이 안 좋다 보니 교사가 좋아보이지만, 여전히 한 명의 자녀조차 대학보내기가 빠듯한 것이 교사의 경제적 현실이다. 정규수업보다 사교육의 하나인 보충수업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으로라도 얼마 안 되는 수입을 보전해야 했던 것이다. 그나마 난 교재 집필로 매년 인세를 받으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선생님들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다. 옛날 선생님들이 맨날 똑같은 옷에 쪼잔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다니는 것이 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을 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난 전교조에 가입했다. 때로는 나의 용기 부족보다 사회 탓으로 모든 잘못을 돌리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보기도 하지만, 난 전교조에 가입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전교조에서 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선생님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고 이제는 분회장(학교 단위의 전교조 대표)까지 하고 있다.
전교조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아이들과 커다란 양푼에 밥을 비벼 먹으며 더불어 사는 마음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성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되 그것을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앨범비와 급식비, 수학여행비의 가격을 낮추면서 품질을 높임으로써 학부모들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보충수업보다 봉급인상이 정규수업을 더 알차게 하여 사교육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늙을 때까지 보람을 갖고 은퇴하기 위해서는 신분 보장 및 공정한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다.
그런데 주위에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전교조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다. 아이들을 성적만으로 평가했던 사람들, 자리에만 연연했던 사람들, 돈 문제와 관련하여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언젠가는 촌지를 받지 않는다고 학부모로부터 '자기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하는 뒷얘기를 들었다. 난 그들에게 화가 났으나 그들을 이해했다.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스승으로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고 촌지를 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가운데 그들도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만 나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 난 내 신념을 지키면서 살면 되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교육이 결코 교육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난 화가 나서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조선, 중앙, 동아에서 전교조를 열심히 욕하기 시작한 때부터인 것 같다. 난 왜 저들이 우리를 좌파 빨갱이로 모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조중동은 직간접적으로 교육과 깊은 관련을 맺고 이권을 챙겨 왔다.(이에 대해 이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64831를 참고하시오) 교육에서 이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전교조는 그들에게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전교조가 교육을 정치적으로 몰아간다는 그들의 말이야 말로 교육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과 함께, 미군, 남한군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자료에 다 있는 것이었다. 어느 한 쪽의 생각만 아니라 반대의 생각도 난 가르쳐야 했기에 저들이 싫어하는 것까지 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난 너무나 억울했다. 아이들과 같이 울고 웃으며 꿈을 노래하고 더불어 사는 것을 가르치려 했던 것이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전교조가 교사들의 철밥통을 챙기느라고 교원평가도 거부하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소리도 들려왔다. 전교조가 교원평가를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 전교조가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교원평가를 받아들이게 되면 사립학교 재단의 횡포를 막을 길이 없다. 사학재단은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교사(아마도 나와 같은 교사일 것이다)를 교원평가라는 미명하에 가차없이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와 관련하여서는 이 블러그 http://blog.daum.net/riulkht/14847458 에 가 보십시오) 교원평가가 정말 교육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모르지만, 우리 나라 사립학교 풍토에서는 학부모나 학생들이 생각하는 교원 평가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순진한 것이다. 작년에 왜 사립학교 재단에서 사학법을 가지고 목숨 걸고 싸웠겠는가? 우리 나라 사학 재단의 비민주성으로 인해 교사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 되기 때문에 교원평가를 반대하는 것이지 단순히 이익 때문만은 아니다. 정말 이익 때문이라면 난 전교조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편안히 내가 집필한 문제집이 얼마나 팔리는가에 신경 쓰며 인세 받아 먹는 재미로 사는 것이 더 이익이다. 아니 나보다 더한 사람들이 있다. 그 좋다는 교직을 지키며 시키는 대로 살면 되지 해직까지 각오하며 싸우는 사람은 뭐라 말인가? 단순한 이익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교육, 그것을 위한 것이다.
전교조는 완벽한 집단인가라는 질문에는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음을 솔직히 시인한다. 전교조 사람들 중에는 전교조의 가치관과 180도 다른 사람도 있고, 전혀 전교조의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왜 전교조에 있는지 모르겠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또한 학생들로부터 못 가르친다는 소리를 듣는 조합원도 있다. 그뿐인가? 얼마 전에는 촛불 문화제에 참여한 학생을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체벌한 조합원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정말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도리어 부정비리를 저지르고, 학생들의 인권을 무시하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교사들은 전교조 교사가 아닌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도 사건이 터지면 전교조 조합원의 경우 '전교조교사'라는 타이틀이 커다랗게 기사에 나거나 왜곡되고, 비조합원의 경우 마치 전교조 교사들도 똑같다는 식으로 기사가 나거나 전교조 교사들이 그들을 비호하고 있다는 식으로 기사가 난다. 난 억울해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전교조에서는 선생님들끼리 엄청나게 싸운다. 남들보다 더 깨끗해야 조그마한 빌미도 조중동에 주지 않는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사실을 왜곡하는 조중동의 기사에 더 억울해 하는 것이다.
문득 전교조에서 말하는 것이 실현된다면 내게 이익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당장 사교육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내게 짭짤한 인세 수입을 안겨 주었던 문제집 집필이 줄어들지 모른다. 또한 특목고 같은 것이 폐지될 것이다. 그러면 똑똑해서 영재학교에 가 혜택를 받을 수 있는 승민이와 하늘이에게 불리할 것이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나와 승민이는 부자지간인데도 가치관이 달라 종종 논쟁을 벌이곤 한다) 그러나 난 그래도 좋다. 당장 눈앞의 이익은 잃을 수 있으나 우리 사회는 그만큼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전교조에 휘둘리면 교육이 무너진다!"
난 다시 차를 몰았다. 난 이 플랭카드를 단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까의 억울한 마음이 말끔히 씻기고 기쁜 마음이 용솟음쳤다. 바로 저 불쌍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나에게 새삼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없었으면 난 선생으로서 있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