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을 것도 같은데!"
어제 황사가 있을 것이니 바깥출입을 삼가라는 일기예보가 있었기에 베란다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황사가 심하면 산행을 하지 않기로 했기에 어쩔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면 가자는 아내와 하늘이의 맞장구에 나는 부랴부랴 준비를 하였다. 내 어렸을 때만 해도 황사가 뭔지도 몰랐던 것 같다. 그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자주, 많이 황사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요즘 황사는 중금속이다, 발암물질이다 해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 않은가? 겨우내 움추렸던 심신을 활짝 펴보이려는 마음에 황사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임에 틀림없다.
"이러다가 봄에 등산이 금지되는 거 아니야?"
하고 생각하니 씁슬함이 밀려들었다. 인간의 욕망이 우리를 옭아메는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집을 나서면서 역시 봄맞이는 봄맞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내는 요 며칠 전 등산복을 새로 샀다. 최근 운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큰 맘 먹고 장만한 것이었다. 상아색 사파리 바람막이에 회색 셔츠, 그리고 쥐색 바지가 잘 어울렸다. 그래서 그런가? 아내의 발걸음에서 봄바람이 이는 느낌이었다.
하늘이는 집을 나서면서부터 조잘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문득 새가 지저귀는 소리로 들린다. 어른들과 달리 세상 걱정거리 하나 없는 재잘거림이 아무 거리낌없이 하늘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요즘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새장에서나 죽은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아이의 재잘거림은 어른들에게 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아내와 하늘이는 이것저것 먹을 것에 대해 말한다. 어찌 보면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밥이 어떻고, 튀김이 어떻고 하면서 벌써부터 먹을 거리 살 얘기만 하니 말이다. 그러나 저들이 얘기하는 것은 진수성찬이 아니다. 그저 출출함을 달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아니던가? 아마 집에 있었으면 이보다 더 비싸고 더 맛난 음식을 찾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들의 얘기가 귀엽게 들린다.
"암, 사고 말고"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서울대 기숙사 쪽으로 해서 등산로를 잡았다. 우리 외에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보통은 서울대 정문 쪽 등산로를 잡았으나, 오늘은 새로운 길을 가고 싶었다. 길을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완만한 오솔길이 좋았다. 정문 쪽 길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통에 시끄럽다. 그런데 이 길은 호젓한 느낌마저도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나무 숲 사이라 그런지 솔내음도 상쾌했다. 정문 쪽은 콘크리트로 길을 만들어 놔 별다른 냄새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 길은 달랐다. 더욱이 자연적인 길이 아닌가? 콘크리트를 입힌 인공적인 길보다는 봄을 더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우리는 능선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현동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과 합류한 것이다. 내려오는 사람도 많았다. 올라가는 사람들이나 내려가는 사람들이나 봄을 한 가득 지고 있었다.
올라가면 갈수록 길이 험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연주대가 이제 한 눈에 들어왔다.
"저거 얼음 아니야?"
아내의 말에 나도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계곡처럼 보이는 곳에 길인지, 물줄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색을 띠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것을 얼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설마 날씨가 이렇게 따뜻한데 얼음일라고 하면서 자세히 살펴 보았다. 바람막이를 입지 않으면 춥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으므로 저 그늘진 골짜기라면 얼음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대 20분'
이제 연주대로 올라가는 입구이다. 아내와 하늘이는 나보다 앞서 길을 잡았다. 난 속으로 조금 있으면 온 것을 후회할지도 모를 걸 하면서 미소를 흘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와 하늘이의 얼굴에 일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깎아지른 절벽과 그곳을 사람들이 오르는 모습을 본 것이다. 절벽 사이로 밧줄이 보이고, 사람들은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아내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보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다. '나 어떡해' 하면서 주저 앉는다. 그러나 어찌하랴 오를 수밖에. 난 아내와 하늘이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뜻밖이다. 하늘이가 먼저 앞서 나선다. 그리고 아내가 그 뒤를 따랐다. 아래를 내려보지 말라는 내 주문에 한 번은 용기를 내고 싶었는지 아래를 내려보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저쪽 밧줄에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보다 더 민첩하게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지기 싫었음일까? 하늘이와 아내가 밧줄을 잡고 올라갔다.
드디어 연주대!
하늘이와 아내는 내가 붙잡지 않았으면 연주대에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올라온 것이 믿기지 않나 보다. 하늘이는 이제 어떤 산이든 다 오를 수 있을 것 같다며 득의만면하였다. 아내는 자축하고 싶었으리라. 연주대에서 파는 막걸리 한 잔 마시겠다고 성화다. 마침 수표밖에 없어 내가 가져온 맥주를 나눠 마시자고 했으나, 수표를 낚아채더니 기어코 막걸리 한 잔을 사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단숨에 마시는 것이었다.
"캬~, 맛좋다!"
이제는 제법 등산객 티까지 내는 아내의 한 마디. 봄은 이렇게 오는 것이었다.
자운암을 통해 하산하면서 그냥 갈 수 있겠냐며 난 아내를 인헌초등학교 앞에 있는 <좋은술자리>라는 곳으로 이끌었다. 빈대떡과 전을 파는 술집이었다. 안은 비록 그리 넓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렵게 자리를 잡아 모듬전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60대 아주머니 세 분이 운영하는 가게인지라 세련돼 보이지는 않았다. 막걸리 한 통을 다 비웠음에도 주문한 모듬전이 나오지 않았다. 미리 만들어 놓고 데워 주는 것이 아니라, 주문 받아 그때그때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 것이다. 다행히 약간 신 김치가 맛있어 일단 기다릴 만 했다.
기다리던 모듬전이 나왔을 때 하늘이와 아내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김치가 약간 섞인 빈대떡부터 해서, 고추전, 호박전, 동태전, 버섯전 등이 푸짐해 보였다. 나도 시장했던 차라 막걸리와 함께 젓가락을 쉴 새 없이 놀렸다.
덤이던가? 아내가 전에는 듣지 못했던 옛날 얘기를 한다. 고등학교 시절 비가 억수로 내리는 밤 12시, 늦게까지 공부하다 집에 가려는데 혼자 가기 무서웠단다. 그런데 옆에 있는 남자 고등학교에서 한 남자애가 나오면서 같이 가자고 하더란다. 마침 우산도 없고 해서 같이 집까지 왔단다. 물론 우산을 썼지만 같이 딱 붙어서 갈 수 없었기에 다 젖고 말았다나? 그 후로 그 남학생을 보고 싶어 시간 맞춰 등교를 했는데, 그때마다 그 남학생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 대학에 들어와 만나게 되었는데, 그 남학생도 자기를 만나고 싶어 시간 맞춰 나왔고, 그때마다 지각을 해서 선생님께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말을 했더란다. 그래서 그 남학생과 정식으로 사귀어 볼려고도 했다나?
아내는 나로부터 질투를 유발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럴 때 아내를 위한 센스 하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반응을 보이면 안 된다. 일단 얼굴을 심각하게 하고, 약간 화가 난 듯한 목소리를 만들자.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좋다.
"그 왕자를 만나지 나같은 거지를 왜 만났어?"
그러면 아내는 웃는다. 그러면 아내는 '질투해?'하고 묻는다. 그때 '질투는 무슨 질투!'하며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하면서 자존심을 세운다. 그러면 아내는
"난 당신을 만난 게 좋아."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난 못 이기는 체 하며
"그럼 그렇지."
하면서 막걸리 잔을 들며 건배하자고 한다.
아내와 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추억을 안주 삼는 것이었다. 그렇게 봄은 오고, 아내와 나의 정은 봄바람처럼 밀려들었다. 다시 오자는 아내와 하늘이의 말과 함께 난 집으로 돌아오면서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봄이여, 난 너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