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기를 잘한 것 같아요!"
워커힐에 들어서면서 신임 선생님들의 계속되는 감탄사가 이어졌다. 난 워커힐의 아름다움보다도 그들의 감탄사가 더욱 예쁘게 들렸다. 워커힐로 소풍 가자는 말을 처음에 했을 때 난 참 부담을 많이 가졌다. 신임 선생들과 분명 세대 차이가 있었기에 내가 좋아하는 풍광을 그들도 좋아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워커힐의 봄경치을 만끽하는 신임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니 그때까지 가졌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나와 3김(김찬일, 김원우, 김정용 선생)은 11시에 교문을 나섰다. 햇살은 약간 따가웠지만 밝은 봄기운은 완연했다. 김신아 선생이 같이 가기로 했다가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전철에 올랐다. 최상희 선생도 다른 지하철을 타고 출발했다고 문자메시지가 왔다. 박카스 한 박스를 들고 가는 수고(?)를 하고 있단다. 박카스 박스라니! 그것을 들고 지하철에 서 있는 최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박카스 한 병을 나누려는 마음이 예쁘게 느껴졌다.
우리는 무슨 얘기를 서로 주고 받았는지 모르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서로 얘기를 나누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어느덧 건대입구역, 그리고 군자역을 거치게 되었다. 광나루역에서 류수근, 엄익환, 최상희 선생이 기다린다고 전화가 왔다. 그리고 최종현 선생은 부인과 자가용을 몰고 이미 워커힐에 올라와 있다는 전화도 있었다.
처음에 우리도 차를 몰고 갈까 했다. 그러나 <진국의 상상로그>라는 블러그에서 봤던 친절한, 아니 감동적인 길안내에 따라 가볍게 산책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게집>을 돌아 굴다리를 지나 우회하는 길을 걸었다. 조용한 주택가 뒷길이었다. 워커힐로 통하는 자동차들이 간간히 왔다갔다 했다.
엄 선생이 갑자기 펀드 얘기를 했다. 2년 동안 착실히 모아 결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면서다. 다행히 김찬일 선생이 작년에 펀드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해 둔 것도 있고, 나 또한 그러한 것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이것저것 조언을 해 주었다. 얘기를 해 주면서 난 내 자신에게 새삼 다짐을 해 본다.
"재테크란 인(忍)테크다."
흔히 말하는 '쪽박'이란 '대박'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성급하게 욕심을 내서 달려들면 재(財)테크가 아니라 재(災)테크가 되지 않는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재태크는 인내를 갖고 꾸준하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우리 나라 최초로 소아마비 아이들을 위한 볼풀이 있었다는 정립회관을 거쳐 워커힐 앞에 왔다. 주차장을 지나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카페테리아가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언덕을 배경 삼아 갖가지 먹을 거리를 장만해 주는 부스가 있었고,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줄을 지어 자리잡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최종현 선생과 통화를 하면서 어디 있냐고 서로를 찾았다. 저쪽 끝에서 최 선생이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부인을 우리에게 소개 시켜 주었다. 임신을 했다 하는데 전혀 그걸 느끼지 못했다. 어딜 가서 부부라고 말해 주지 않는다면 다정한 연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배가 고팠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이 상황을 이르는 말일 게다. 나는 사람들을 <피자힐>로 안내했다. 워커힐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그 곳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피자를 판 곳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곳이다. 역삼각형 모양의 건물은 보기에도 위태위태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건물 안의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으나 예약을 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말이 전해져 왔다. 아쉬웠지만 어쩌랴? 우리는 파라솔이 있는 야외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피자를 시켰다. 웨이터의 추천에 따라 해물피자를 시켰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장 관심을 보인 사람은 류수근 선생이었다. 콜라와 곁들인 해물피자는 담백했다. 빵의 아랫부분을 들어 보니 내 생각에는 허브 아니면 파슬리 가루를 함께 해서 반죽한 것 같았다.
조그만 무대에서 한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삼포 가는 길'이라는 노래가 들렸을 때 난 최 선생에게 저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모른다는 대답. 분명 그것은 나와 최 선생 사이의 세대차이였다. 그러나 그 노래를 알고 모르고가 뭐 중요하겠는가? 그걸 들으며 같이 식사를 하고, 재미난 얘기를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다면 그만인 것을.
우리는 피자힐을 내려오면서 경치를 즐기고 사진을 찍었다. 김찬일 선생의 카메라는 어느 사이에 김정용, 엄익환 선생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만지는 아이처럼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W호텔 앞에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사진을 찍으면서 보냈다. 최 선생의 부인은 사진을 찍기도 하고 찍히기도 하면서 우리와 스스럼 없이 어울렸다. 명월관으로 옮겨 우리는 한강과 맞은편 천호동 쪽을 바라면서 드넒은 풍광을 즐겼다.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전망이었다. 한강은 조용히 흐르고, 양옆으로 수많은 차들이 지나갔다. 어찌나 밝은지 천호동을 넘어 저 멀리 산까지 가깝게 보였다.
명월관을 지나 다시 우리는 워커힐 입구 주차장에 이르렀다. 최 선생 내외는 아쉽지만 우리와 달리 길을 잡았다. 우리는 아까 지나쳤던 자연생태체험장에 들러 내가 가져온 맥주와 류수근 선생이 직접 만든 빵을 먹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유치원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윽'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 보았다. 최상희 선생이 어쩔줄을 몰라했다. 김찬일 선생이 '첫사랑의 끝맛'이라고 하면서 최 선생을 꼬드겨 라일락잎을 먹였단다. 얼마나 썼던지 최상희 선생이 놀랬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 재미있다 웃었으나 최 선생은 쓴맛보다 속은 것이 억울해 하는 얼굴이다. 난 속으로
"그러니 사랑의 실패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게 좋겠죠?"
하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체육시설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약간 언덕이라 바람이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난 맥주를 아이스팩에 같이 넣어 왔다. 좀더 시원한 맥주를 선생님들에게 맛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류수근 선생이 만들어온 빵은 맛있었다. 달지도 않으면서 달콤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제일 많이 먹은 것 같았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면서 많은 시간을 시험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신임 선생님들이 시험문제 출제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김찬일 선생과 나는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출제 노하우를 얘기해 주었다.
"다시 출제해야겠어요."
하며 좀더 좋은 문제를 출제해 보겠다고 다짐을 하는 신임 선생님들의 열의가 진하게 느껴졌다. 신임 선생들의 시행착오와 그 속에서 보여주는 열의. 그것은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난 문득 신임 교사들에게 내 대학시절의 한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학시절 약간의 사치를 내기 위해 세종문화회관 뒷쪽에 있는 카페에서 진토닉을 마셨던 추억이 내게 있었다. 나는 언젠가 신임교사들의 대학 문화를 접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내 대학시절의 문화를 그들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신임 선생님들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곧 나를 따라 전철에 올랐다.
아쉽게도 내 추억이 서린 <겨울>이라는 카페는 그때까지도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가을>이라는 카페로 갔다. 김찬일 선생은 <봄>, <여름>이라는 카페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공통의 대학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진토닉과 칵테일, 맥주를 각각 주문했다. 이런저런 얘기 가운데 김원우 선생의 '오타쿠강의'가 가장 재미있었다. 성보에 오자마자 근처 문방구를 뒤졌다는 김 선생. 말로만 듣던 오타구 문화를 난 가까이서 느끼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다양하게 만나 볼 일이다. 내가 이들과 자리를 하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우물안 개구리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
아쉽게도 난 또다른 약속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김찬일 선생은 그냥 갈 수 없다면 인사동 쪽에 가서 삼합과 막걸리 한 잔을 더 하자고 했다. 나도 그 자리에 무척 끼고 싶었으나 아쉬움을 남겨야 했다. 아니 나보다는 김찬일 선생이 신임 교사들과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더 가까울 것이기에 내가 그 시점에서 빠지는 것도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광화문을 등지고 버스에 오르면서 난 내 마음을 달래야 했다.
지금 정말 즐거운 시간이 추억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