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콘서트!
잠실실내체육관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어두침침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다지 신이 나지 않았다. 체육관 앞도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찾아들어간 식당도 칙칙한 매점이었고, 우리가 먹으려고 했던 카레라이스와 우동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와 아내는 우리의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높은 천장과 둥그런 3층의 체육관도 역시 그다지 꽉 찬 느낌이 아니었다. 드문드문 자리가 비어 있었고, 무대는 하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의 자리는 뒤에서 세 번째에 있었다. 하얀 프라스틱 의자에 빨간색 방석이 전부였다.
“이래 가지고 무슨 흥이 날까?”
하는 의구심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내 기분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순간 눈을 돌렸을 때 비어 있던 자리가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우리가 앉아 있는 중앙 플로어 석뿐만 아니라, 2층, 3층 좌석에 언제 들어 왔는지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의 손에는 야광봉이 쥐어져 있었고,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그것도 같이 움직였다.
지영이의 손에도 야광봉이 들려 있었다. 소녀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까? 아이들이나 샀을 법한 야광봉이 40대의 아주머니 손에 들려 있었다. 하긴 이번 콘서트가 몇 년 만일까? 나와 같이 간 것이 대학 때였으니까, 거의 20여 년만에 처음이다. 그때 기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저녁 8시.
공연 시간이 되었을 때는 사람들로 빈 자리가 없었다. 카메라 테스트를 겸하려고 하는지, 카메라가 관객들을 비추었다. 자기 얼굴이 나왔을 때 한 여자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장난기가 발동했을까? 자막으로 “손 좀 내리시죠. 안 그러면 공연 안 합니다.”는 말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박수로서 그 여자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러자 여자는 부끄러운 얼굴을 살짝 보이기도 했다.
카메라는 또 다른 관객을 비추었다. 나이 지긋하신 분과 젊은 여자였다. 모녀지간인 듯 싶었다. 그런데 부끄러움을 더 타는 것은 딸이 아니라 어머니 쪽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자리에 왔기 때문일까? 난 도리어 모녀의 모습이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상상해 보았다. 하늘이와 지영이, 아니 하늘이와 내가 콘서트에 올 날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았다.
자막으로 팜플렛을 펼쳐 보이라고 했다. “Great” 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씌어 있었다. 그것은 이승철을 한 마디로 압축한 말이었다. 그가 데뷰한 것이 1985년이라 한다. 독특한 창법과 노래에 대한 열정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였다. 그는 20여 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중년의 나이를 속이지 못하고 나온 배를 허리띠로 졸라맨 몸매인 것 같았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니 “ Great”라는 말이 어찌 어울리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팜플렛을 파도가 넘실대듯이 흔들어 주었다.
드디어 공연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5,4,3,2,1!
커튼이 올라가고 아라비아 풍의 음악과 함께 댄서들의 춤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화려한 조명, 순간적으로 터지는 불꽃과 함께 오늘의 주인공 이승철이 등장했다. 그와 함께 관객들도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노래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야광봉을 흔들고, 몸을 흔들어 댔다.
나는 춤을 못 춘다. 다만 리듬에 맞춰 손뼉을 치고, 어깨와 머리를 흔들 뿐이다. 그러나 난 그것으로 만족한다. 내가 춤을 잘 춰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가식을 낳는다. 그러면 난 집에서 노래를 틀어놓고 남 몰래 추는 것보다 못 하리라. 나는 리듬을 좋아한다. 그 리듬에 맞춰 그 동안의 굴레를 풀어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나도 환호성을 지르고, 몸을 흔들어 댔다.
이승철은 잠시 노래를 멈추고 자기에 대해 얘기했다. 자신이 지나온 이야기와 최근 재혼하여 애가 생긴 이야기였다. 애가 있다는 말을 할 때는 수줍음을 탔다.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저럴까? 그러나 그것이 매력일 것이다. 어려움을 딛고 다시 가수로서 새 출발하는 시점에서 그는 아마 다시 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깜짝 이벤트가 펼쳐졌다. 한 관객이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싶다고 전해 와서 그 기회를 주겠단다. 그 두 남녀는 무대 위로 올라왔다. 29살의 동갑내기였다. 이승철이 뭔가를 물을 때 수줍어서인지, 아니면 떨려서인지 여자는 애띤 목소리로 뜸을 들이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남녀는 고등학교 동창생이란다. 본격적으로 사귄 것은 남자가 재수할 때라니, 그렇다면 두 남녀는 10여년을 같이 지냈다는 말이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편지를 썼단다.
“한 달이면 싫증을 내는 자신이지만 너만은 영원히 싫증을 내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사랑을 고백한다.”
라는 대사가 나왔을 때 관객들에게서 탄성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문득 나는 지영이에게 어떻게 사랑을 고백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봐도 별로 낭만적이지 못했다. “우리 사귀어 보자.”, “그래 그래 보자.”는 간단한 대화가 전부인 우리의 프로포즈.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 누구보다도 낭만적이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뜨겁게 사랑하고, 1년여 시간을 헤어지기도 하고, 다시 만나 결혼을 하기까지 6년, 그리고 지금까지 총 20여년을 같이 살았다. 순간 순간 마음 졸이게 하는 사랑. 그것으로 난 행복했다.
난 노래 가사를 잘 외우지 않는다. 그냥 음악이 좋으면 속으로 흥얼거릴 뿐이다. 지영이는 노래 가사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난 노래를 따라 부르지 못하고 음악에 몸을 흔들고, 지영이는 야광봉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감미로운 노래가 나올 때는 지영이를 안고 춤을 추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지영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기 때문에 그러지를 못했다.
“아줌마가 부끄러움을 타기는….”
공연장을 절정에 다다랐다. 이승철의 노래 중에서 가장 흥겨운 노래들이 이어졌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은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앉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특히 여자 관객들은 괴성까지 지르며 예전의 소녀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분명 얼굴은 주름이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그 어떤 주름도 없으리라. 마음 속에 끓고 있는 열정이 온 몸의 주름을 감싸, 활짝 펴 버렸을 것이다.
여자들이 가장 좋아 하는 “마지막 콘서트”라는 노래에서, 이승철의 상징인 “밖으로~”가 호흡을 멉추지 않은 채 이어졌다. 옆에 있는 지영이도 탄성을 올리지 않을 수 없는지 소리를 질렀다. 아마 저 하나가 이승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것을 위해 이승철은 끊임없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을 것이다. 주위 사람에게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을 보여주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 그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콘서트는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승철은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인사를 했다. 자기도 감격했는지 울먹이는 얼굴이었다. 불혹의 나이에 자신을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으니 그럴 만도 하리라. 프로는 저러해야 한다. 열정을 갖고 자신을 보여주고, 겸허히 사람들의 박수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프로의 모습이리라.
마지막 노래로 “I am sailing”이 불려졌다. 나는 이 노래를 잘 안다. 내 학창시절에 즐겨 블렀던 노래였다. 난 따라 불렀다. 그리고 지영이를 뒤에서 안았다. 지영이도 이번에는 부끄러움을 잊었는지, 나에게 몸을 맡기고 움직이며 같이 노래를 불렀다. 난 20여년 간을 지영이와 삶을 항해하고 있다. 감미로운 노래와 달리 우리의 삶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난 그녀와 함께 가고 있다. 오늘은 이렇게 같이 노래에 맞춰 몸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철 콘서트.
오늘 우리는 그로 인해 젊은 시절의 열정을 가져 보았다. 그로 인해 2007년 12월은 잊지 못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