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 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 나희덕 <기억의 자리>
때로는 아무리 아름다운 추억도 기억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만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라미에 대한 추억.
눈부신 날이었고, 벗어날 수 없는 날입니다.